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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일이다. 정월대보름 아침 일찍 이웃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서 불렀다. 나는 엉겁결에 "왜?"하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 더위!"라는 말을 했다. 아뿔싸 "먼저 더위!"를 외쳤어야 하는 건데... 그 해 나는 그 친구의 더위를 대신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풍속을 더위팔기(매서:賣暑)라고 했으며, 이렇게 우리는 정월대보름을 시작하곤 했다.
내일(2월 26일)은 우리 민족 명절 중의 하나인 정월대보름이다. 율력서(律曆書)에 의하면 정월은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점쳐보는 달이라 한다.
정월 대보름날 뜨는 보름달을 보며 한 해의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하다"고 적혀 있다. 우리도 뒷동산에 오를 수 없으면 한강 둔치에라도 나가 달맞이를 하며, 소원을 빌어 보는 것은 어떨까? 너그럽고 포근하며, 아름다운 달빛소나타에 온 몸을 맡긴 채 지난 어린 추억을 더듬는다.
정월대보름의 세시풍속
우리나라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정월을 '노달기'라 하여 농민들은 휴식을 취하며 농사준비를 한다. 또 다양한 제사의식과 점세(占歲:점치기) 및 놀이가 행해진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대보름날 자정을 전후로 제관을 선출하여 풍요로운 생산과 마을의 평안을 축원하는 동제(洞祭:마을제사)를 지낸다.
전남 해남군 도둑잡이굿, 전남 완도군 장보고당제, 전남 보성군 벌교갯제, 충남 연기군 전의 장승제, 전북 고창의 오거리 당산제, 경북 안동군 도산 부인당제, 경북 안동군 마령동별신제, 강원도 삼척군 원덕 남근제, 전북 김제시 마현 당제 등이 있다.
이 중 남근제(男根祭)는 동해안 신남마을의 동제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과 음력 시월 초아흐레에 당제를 지내는 해신당이 있이 있는데 이 해신당을 오르는 길옆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남근모양의 장승이 서있다. 결혼을 앞둔 젊은 처녀가 갯바위에서 미역을 따다 파도에 쓸려 목숨을 잃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해신당을 짓고 남근(男根)을 깎아 바치며 처녀의 외로운 넋을 달랬다. 해신당 옆 향나무에는 남근목(男根木)들이 새끼줄에 묶여있다. 매해 정월대보름에는 ‘남근제’, '남근깎기 경연대회'가 열린다.
부럼깨기(작절:嚼癤), 연날리기,
대보름날 아침 일찍 날밤, 호두, 은행, 잣, 땅콩 등의 견과류(단단한 껍데기와 깍정이에 싸여 한 개의 씨만 들어있는 열매)를 깨물면서 "일년 열두 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원하며, 깨물 때 '딱' 하는 소리에 잡귀가 물러간다고 생각했다. 또 평안도 의주의 풍속에 젊은 남녀가 이른 아침에 엿을 씹는데, 이것을 '이굳히엿'이라 하며, 부럼깨기와 비슷한 풍속이다.
견과류는 암을 억제하는 물질인 '프로테아제 억제제'와 '폴리페놀류'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 암예방 효과가 있으며, 또한 항산화 효과가 있는 비타민 E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고, 불포화 지방산의 함량이 많아 콜레스테롤을 낮춰준다고 전해진다. 정월대보름의 '부럼깨기'로 한겨울 동안 추위에 시달린 체력을 증강시킬 수 있도록 한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엿보인다.
하지만 견과류는 다른 식품에 비해 수분이 아주 적은 고열량, 고영양 식품이므로 한꺼번에 많은 먹으면 살이 찔 수 있으므로 주의를 하여야 한다. 또 땅콩은 보관을 잘못하면 곰팡이에 의해 아플라톡신이라는 발암물질이 생성될 수 있다.
아이들은 대보름날이 되면 '액연(厄鳶) 띄운다'고 하여 연에다 "액(厄)"자 하나를 쓰기도 하고 "송액(送厄:액을 날려 보낸다)"나 "송액영복(送厄迎福:액을 날리고, 복을 맞는다), 신액소멸(身厄消滅:병과 액을 물리친다)"이라고 써서 얼레에 감겨있던 실을 모두 풀거나 끊어서 멀리 날려 보낸다.
쥐불놀이/쥐불놓이(서화희:鼠火戱)
농촌에서 정월 첫 쥐날(上子日)에 쥐를 쫓는 뜻으로 논밭둑에 불을 놓는 세시풍속의 한 가지이다. 이날은 마을마다 아이들이 논두렁이나 밭두렁에다 짚을 놓고 해가 지면 일제히 "망월이야"하고 외치면서 밭두렁과 논두렁, 마른 잔디에 불을 놓는다. 불은 사방에서 일어나 장관을 이루는데, 이것을 쥐불놀이 또는 쥐불놓이라 한다.
이 쥐불놀이는 쥐를 없애기 위함과 논밭의 해충과 세균을 제거하고 마른풀 베기를 쉽게 하며, 또 새싹이 잘 자랄 수 있게 함이라고 한다.
이 쥐불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해의 풍흉, 또는 그 마을의 길흉을 점치기도 하는데 불이 크게 일어나면 좋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과 대응하여 쥐불을 놓기도 하는데 한쪽 마을의 쥐불이 왕성하면 쥐들은 기세가 약한 쪽 마을로 옮겨가게 되며, 불의 기세가 큰 마을이 이기는 것으로 된다. 또 이긴 편의 쥐가 진편으로 쫓겨 가서 이긴 편 마을에서는 농작물에 해를 입지 않게 된다고 믿었다.
이 쥐불놀이는 함경도에서부터 전라도에까지 온 나라에서 즐기는 풍속이다. 구멍을 뚫은 깡통에 철사 끈을 달아 불쏘시개(특히 광솔: 송진이 엉겨서 생긴 소나무 가지의 공이)를 넣고 윙윙 소리 내어 돌리는 놀이도 한다.
정월대보름의 점치기
초저녁에 뒷동산에 올라가서 달맞이를 하는데 맞는 달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또 대보름날 밤에 달집태우기를 하는데, 짚이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 위에 쌓아 놓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른다.
대보름 밤 사발에 재를 담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씨앗을 담아 지붕 위에 올려놓고 이튿날 아침 씨앗들이 남아 있으면 풍년이 되고, 날아갔거나 떨어졌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나무 그림자점은 한 자 길이의 나무를 마당 가운데 세워 놓고 자정 무렵 그 나무 비치는 그림자의 길이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쌀을 한 데 모아 빻아서 찐 떡을 “도돔떡”이라고 한다. 떡을 찔 때는 한 사람 분 씩 가루를 안치고 켜마다 자기 이름을 쓴 종이를 넣는데, 떡이 잘되고 못됨을 보아 그 사람의 한 해 길흉을 점쳤다. 특히 떡이 설익으면 운이 나쁘다고 하여 그 떡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버리는 풍속이 전해온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 기장, 피, 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곁에 세워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며, 복토 훔치기는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의 부뚜막에 발라 복을 기원한다. 용알 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어와 풍년과 운수대통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이다.
곡식 안내기는 농가에서 정초에 자기 집 곡식을 팔거나 빌려주지 않는다는 풍속이다. 이 시기에 곡식을 내게 되면 자기 재산이 남에게 가게 된다는 생각 때문에 행해진 풍속이다. 아침 식사 후에는 소에게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이 오곡밥과 나물을 키에 차려주는데, 소가 오곡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믿는다.
구례 문척지방의 달집태우기는 어른들의 불놀이이다. 정월대보름이면 마을 장정들이 산에 올라 생나무를 한 짐씩 해 온다. 해 온 나무는 마을 앞 넓은 마당에 쌓여지고, 나무 사이에는 생대나무를 섞어 폭죽의 효과를 내도록 하는데 이것이 '달집'이다.
이 달집은 달이 막 떠오르는 순간에 불을 붙여 태워야 하는데 달집에 먼저 불을 붙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린다. 맨 먼저 달집에 불을 지르면 총각들은 장가를 가고 득남을 한다고 믿었다. 달집 불에 콩을 볶아 먹기도 했는데 그러면 한 해 동안 이를 앓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달집의 불이 활활 잘 타고 연기가 많이 날수록 마을이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지신밟기, 다리밟기(답교:踏橋)
지신밟기는 정초부터 대보름 무렵에 마을의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며 흥겹게 놀고, 축원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 마당밟기, 매귀(埋鬼:귀신이 나오지 못하도록 밟는 것), 걸립(乞粒:동네에서 쓸 공동경비를 여러 사람들이 다니면서 풍물을 치고 재주를 부리며, 돈이나 곡식을 구하는 일) 등으로 불리운다.
정월 대보름날 밤 다리를 밟으면 1년 동안 다리병이 없고, 열 두 다리를 밟아 지나가면 열 두 달의 액을 면한다고 믿었다. 다리를 많이 지나갈수록 좋다고 해서 성안에 있는 모든 다리를 밟고 지나갔는데 이것을 '다름밟기'라고 한다고 했다. 서울에선 대광통교(大廣通橋), 소광통교(小廣通橋) 및 수표교(水標橋)에 가장 많이 모이며, 이날은 관례에 따라 통행금지를 완화했다.
이 외에 정월대보름에 하는 민속놀이로는 나무쇠싸움(쇠머리 싸움), 놋다리밟기, 봉죽놀이, 사자놀이(주지놀음), 줄다리기, 고싸움놀이, 당산옷 입히기, 관원놀이(감영놀이), 농기세배, 보름새기(섣달 그믐날의 해지키/수세와 비슷함), 제웅치기, 나무조롱달기, 개보름쇠기, 모기불놓기, 방실놀이, 뱀치기 등도 있다.
대보름의 시절음식과 나물
오곡, 즉 찹쌀, 찰수수, 팥, 차조, 콩을 섞어 밥을 지어 먹는다. 대보름엔 아홉 가지 나물에 아홉 번 밥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 집 이상의 성이 다른 사람 집의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한다.
정월대보름날은 오곡에 보통 먹는 멥쌀 대신 찹쌀을 넣는다. 찰밥은 멥쌀밥보다 영양분이 풍부하고 차진 기운이 많아 소화도 잘 된다. <삼국유사>(卷 第一)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보면 신라 제 21대 소지왕(炤智王)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날아온 까마귀가 왕을 깨닫게 했다. 그래서 보름날 까마귀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정월대보름을 「까마귀 제삿날(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복리(福裏) 또는 복쌈은 대보름날에 취나물이나 배추 잎, 혹은 김에 밥을 싸서 먹는 것을 말한다.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 쌓듯이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온다고 전한다. 동국세시기에는 보면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했다. 그래서 대보름날 아침에 웃어른께 데우지 않은 청주를 드시게 하여 귀가 밝아지길 바라며 또한 일 년 내내 좋은 소리를 듣기 기원하였는데 이를 '귀밝이술(이명주:耳明酒)'라고 한다.
봄이 오면 풀과 나무 그리고 온갖 동물들이 힘찬 도약을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몸이 나른하고, 자꾸 졸리며, 입맛도 없어져 공부나 일을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겨우내 푸른 채소를 충분히 섭취하지 못한 우리 몸은 부신피질호르몬(항(抗) 스트레스 작용을 함)을 만들어내는 비타민이 거의 고갈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날씨가 따뜻해져서 갑자기 체온이 올라가게 되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피부혈관이 확장돼 혈액이 피부 쪽으로 몰리면 자연히 내장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고, 소화액의 분비도 떨어져 식욕부진이 생기는데 이게 춘곤증이라고 한다.
이 때 우리는 자연에게서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복이 있다. 새봄이 오자마자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온 들판에는 파릇파릇 온갖 나물이 자라기 시작한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보면 요즘 우리가 먹는 나물은 산나물 96종류, 들나물 60종류, 재배채소 23종류에 달한다고 전한다.
종류가 많은 만큼 며느리밑씻개, 파드득나물, 소리쟁이, 엘레지, 쑥부쟁이, 광대수염, 족두리풀 등 이름이 소박하고 재미있는 것이 많으며, 지금도 흔히 접할 수 있는 나물은 달래, 취, 냉이, 씀바귀, 돌나물, 미나리, 두릅, 원추리, 더덕 등 수십 가지다. 먹는 방법도 다양해 쌈으로 먹는가 하면 살짝 데쳐 볶거나 초고추장이나 간장에 무치기도 한다. 곡물가루와 섞어 전을 부치거나 적으로 꿰고 튀김도 한다. 생채, 김치로도 해먹고, 국, 찌개, 전골에도 넣는다.
겨우내 부족했던 비타민과 무기질을 보충하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나물먹기는 슬기로움의 산물이 아닐까? 나물은 우리의 몸의 변화 때문인지 더욱 맛있고 신선하다. 우리의 식탁에 봄의 향기를 수놓는 나물의 잔치를 해보았으면 한다.
정월대보름을 연인의 날로
신라시대 때부터 정월 대보름에는 처녀들이 일년 중 단 한번 공식적으로 외출을 허락 받은 날이었다. 그 외출은 '탑돌이'를 위한 것이었는데 미혼의 젊은 남녀가 탑을 돌다가 눈이 맞아 마음이 통하면 사랑을 나누는 그런 날이었다.
탑돌이 중 마음에 드는 남정네를 만났지만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채 울안에 갇혀 사는 처녀들의 상사병(相思病)을 '보름병'이라 했다고 전한다. 조선 세조 때 서울 원각사(圓覺寺) '탑돌이'는 풍기가 문란하여 금지령까지 내렸다. 따라서 이 대보름날은 바로 우리나라 토종 연인의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발렌타인데이가 아니라 정월대보름을 연인의 날로 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 또 봄이 오는 길목에 있는 정월대보름을 우리의 새로운 도약의 날로 삼으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참고
<나의 뿌리 : www.goodfamily.net/myroot/sub05_1_a.htm>
<한국의 민속놀이 : computer.hansei.ac.kr/CONTEST/홈페이지부문/(4099)김정화/1.htm>
<사라져가는 풍습 : user.chollian.net/~cha0523/>
<이미숙 박사의 건강한 식탁 : dietnote.co.kr/tennis/t27.htm>
<쿠키/봄나물, 손정우 <배화여자대학 전통조리과 교수> => http://cooki.co.kr/namul2.htm >
<한국민속학 => http://ns.koreastudy.co.kr/4/index41/146.htm>
<한국민속대사전 : 민족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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