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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보름날 밤, 부황리 논둑 길을 혼자 걷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들판에는 염소들만 묶여 있습니다.
아직은 찬 공기가 버거운지 염소들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자주 뒤척입니다.
밤길에 나와 대보름 달을 본 것이 얼마만인가.
달빛 때문일까요.
엎드려 있던 염소가 일어나 한동안 먼 곳을 우두커니 바라다봅니다.
어딜 가려는 거지, 묶여 있는데.
몇 발짝이나 걸었을까.
염소는 체념한 듯 이내 풀을 뜯기 시작합니다.
염소는 존재의 허기를 대보름 달빛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염소는 제 발 앞의 풀부터 차례로 뜯어 나갑니다.
풀을 뜯기 위해 염소는 밤새 묶인 줄을 끌며 앉았다 서기를 반복할 것입니다.
같은 달 아래 뜯을 풀도 없이 신문지 몇 장 덮고 웅크려 있을 도시의 노숙자들을 생각합니다.
미국의 군대에 내몰려 황무지를 헤매고 있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눈은 작아서 멀리 있는 노숙자들은 보지 못하고, 피난민들은 보지 못하고 가까운 곳의 염소들만 오래 바라다봅니다.
염소들도 본디 야생의 시절에는 산 속의 동굴이나 바위 밑, 따뜻한 풀숲으로
둘러 쌓인 집이 있었을 것입니다.
집 없는 사람들, 집 없는 염소들, 밝은 달빛이 더욱 서럽습니다.
존재의 거처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인 집.
사람이나 짐승이나 노숙의 삶은 모든 집 있는 존재들의 치욕입니다.
잠들지 못하는 저 밤 들판의 염소와, 오리와 소와 돼지와 닭들은 본래의 존재 의미를 빼앗기고 오로지 사람의 먹이가 되기 위해 사육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기로 사람은 배가 부르고 살이 찝니다.
일터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도는 노동자들, 아프가니스탄, 콩고, 보스니아, 전쟁터의 피난민들, 그들 또한 저 염소나, 돼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들판으로 내몰려 자본가들, 무기상들의 먹이로 사육 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를 마시고 살을 뜯으며 자본가들과 무기상들, 제국주의자들은 살이 찌고, 뼈가 굵어집니다.
대보름 달이 황원포 바다 위를 느리게 건너갑니다.
달빛 속에서 미국의 전쟁 위협에 잠 못 드는 한반도 북쪽의 사람들을 봅니다.
50여 년 전, 한국 전쟁으로 부를 챙기고 권력기반을 다진 자들의 얼굴을 봅니다.
다시 전쟁을 부추겨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을 봅니다.
철학자 칸트는 '전쟁이란 어느 누구도 그것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되는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이 아니라 그 어떠한 신의 나라일지라도 전쟁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정의도 전쟁과 악수하는 순간 악이 됩니다.
어떠한 신도 전쟁의 수호신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신이 아니게 됩니다.
적막한 대보름 달밤, 섬 마을 들판은 평온하고, 밤바다는 고요합니다.
이 평화로운 밤에 미국이 정의와 평화와 신의 이름으로 저질렀던 수많은 전쟁들을 생각합니다.
미국 군대에 의해 학살된 수천, 수만의 한국인들, 수백, 수천만의 아메리카 원주민들, 아프리카 노예들, 베트남,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학살의 기록이 역사의 전부인 나라를 생각합니다.
달밤, 염소, 사람, 식민지, 제국주의, 전쟁, 살육...... 살육.
다시 학살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슬픔의 날들이 돌아옵니다.
슬픔은 운명이 아니라 존재에서 옵니다.
보길도 황원포 앞 바다에 존재의 슬픔이 밀려옵니다.
존재의 피비린내가 몰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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