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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간, '노동운동사'라는 문패를 단 책은 출간된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잘 나가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면 누가 해묵은 파업의 장면에 감동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 '장사 안되는' 책을 6년 동안이나 끙끙댄 끝에 펴낸 사람이 있다. 더구나 이 사람은 초등학교 외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30여 년 간 인쇄소, 조선소, 자동차 부품 업체 등지에서 일해온 올해 마흔 셋의 '진짜배기 노동자'이다.
지난 3월 21일 저녁 울산 북구청 대회의실. 최악의 황사에 빗방울까지 뿌리는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행사장을 채우고 있다. 점잖게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부터 작업복에 투쟁 조끼를 입은 사람까지, 사투리도 전국 각지이다. 안승천(43세. 한국노동자운동연대 의장, 사회당 부대표) 씨가 펴낸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박종철 출판사) 출판기념회장이다.
"출판 기념회라길래 얼음 조각이 놓여 있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케이크라도 자를 줄 알았다"는 누군가의 농담처럼 이곳은 동원된 인원과 의례적인 축사, 사인 세례가 이어지는 여느 출판기념회와는 사뭇 다르다.
축하노래를 불러주러온 효성의 여성 해고자는 노래 중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울음을 터트린다. 생전 처음 이런 자리에 와본 발전 산업노조 가족들은 그 모습에 덩달아 눈물이 난다. 대우자동차노동조합, 효성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 광주 캐리어 사내하청 노동조합 등 투쟁의 한가운데 있는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한다. '축하한다'는 말보다 '열심히 투쟁하자'는 말이 더 많다.
이곳이 보통의 출판기념회장이 아닌 것처럼 안승천 씨가 펴낸 책도 보통의 역사책과는 다르다.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의 시작은 저자가 울산에서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던 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자의 감성을 흔드는, 쉽게 쓴 노동운동사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노동자인 내가 쓰면 가장 잘 쓸 수 있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1960년 부산의 빈민촌에서 태어나 열 세 살 되던 1973년부터 인쇄소 보조공으로 노동 현장에 첫 발을 내딛었던 이력을 생각해볼 때 그의 결심은 충분히 이유 있어 보인다. 그는 검정고시를 거쳐 1988년 부산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2년만에 중퇴하고 다시 노동자 생활로 돌아가기도 했다.
30여 년에 걸친 노동운동의 장면, 장면을 생생한 필체로 엮었다는 자료적 가치에 겸해 이 책은 이제는 '역사'가 된 199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논쟁의 출발이 될 것으로 보인다.
"90년대는 민주노조운동의 양적 확대와 질적 퇴조의 시기이다. 이제 노동운동은 타협적, 개량적 운동으로 귀착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 투쟁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상황을 계기로 한 단계 발전할 것인가의 전환기에 있다"는 저자의 진단이 노동운동의 앞날을 모색하는 활기찬 논쟁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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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자 운동, 투쟁의 기록 - 전태일에서 민주노총까지
안승천 지음, 박종철출판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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