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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그나마 남아있던 중국과 북한마저도 자본주의적 질서에 의해 포섭되어 가는 형편을 보노라면, 우리는 가히 자본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펼쳐지는 지구화의 거대한 흐름도 새로운 자본질서의 구축 외에 다름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과연 자본주의는 고삐가 풀린 것인가?
이미 IMF 사태를 경험한 우리들은 고삐 풀린 자본의 횡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구조조정이라는 미명 하에 수많은 실직자, 노숙자들이 양산되었고, 그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화되었으며, IMF를 일찍 졸업했다고 하는 지금도 정부의 공기업 사유화(민영화) 조치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거센 항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이주노동자들, 조선족, 탈북자들은 국내로 계속하여 밀려든다. 이 모든 게 최근 10년 남짓한 기간에 생겨난 현상들이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 꼬인 것일까?
이 책의 저자들은 지구화로 격변하는 오늘의 세계를 분석하여 전에 없이 새로운 '제국'이 등장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있다. 여기서 '제국'이란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일국적인 의미의 제국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예컨대, 세계 초강대국으로 오만한 패권주의를 자랑하는 미국을 지칭하는 말도 아니며, 그렇다고 UN이나 WTO 같은 세계기구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제국은 탈중심화, 탈영토화되어 있는 오늘날 세계 자본의 지배를 지칭한다. 따라서 제국은 국가, 국민을 넘어선 개념으로 완전히 탈근대적 방식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괴물 같은 기계다.
이 괴물은 마치 <제 5원소>라는 영화에 나오는 '악'처럼 모든 권력, 거대 서사, 자본들을 죄다 제 안에 빨아들여 몸집을 거대하게 불려 가는 무서운 놈이다. 놀랍게도, 심지어 그린피스나 앰네스티 같은 환경, 인권 보호를 위한 NGO 국제단체들마저도 제국에 봉사할 뿐이라는 게 저자들의 생각이다. 제국의 구성에는 레닌이 말한 약한 고리도 존재하지 않고, 그 권력의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을 무너뜨리려면 제국의 핵심을 제국의 강점을 공격해야 한다.
철의 제국인 로마를 무너뜨린 것이 야만인들이었듯이 이 제국도 결국에는 새로운 야만인들에 의해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저자들은 예견하고 있다. 이 야만인들은 생체 정치적 생성을 통하여 잡종성, 특이성을 갖춘 신체로 자신들을 변화시키는데, 그들의 지적이고 협동적인 저항이 제국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 야만인들은 다름 아닌 대중(multitude)들이다.
이 대중 개념은 민중(the mob), 군중(the crowd), 대중(the mass)같은 수동적 주체들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대중(multitude)은 능동적, 자율적인 복수성이며 민주주의적인 주체들이다. 이 대중들은 제국에 저항하면서 전지구적 시민권, 사회적 임금권을 요구하고 궁극적으로 생산수단의 재전유권을 획득하려 한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무슨 공상과학 소설의 줄거리 같이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저자들의 주장을 단순화시켜서 말해서 그렇지, 황당무계하고 근거 없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공산주의자이면서 오늘의 세계 지성으로 손꼽히는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그 과정을 매우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냐면 그들이 서문에 언급하는 것처럼 철학적, 역사적, 문학적, 경제적, 정치적, 인류학적인 접근 방법들을 섭렵하여 광범위하게 아우르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책을 읽어 가는 동안 웅장한 인문학적 오케스트라가 펼쳐지는 걸 경험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저자들의 논지를 따라가며 제대로 이해하기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번역자가 훌륭하고 자상한 번역 솜씨를 보여주고 있고, 부록에 친절하게 달아준 어려운 용어 해설과 인물 약전을 참조한다면 그다지 겁을 내지 않아도 될 듯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민중신학도인 내게 가장 주목을 끈 개념이 바로 '대중'(multitude)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제국' 개념이 정교화된 반면, 대중은 개념은 다소 추상적이고 시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서문을 통해 인정하고 있다. '제국'과 '대중'이라는 개념이 이 책이 말하는 가장 핵심 개념에 속한다고 볼 때 안타까운 일이다.
나의 소견으로는, 저자들이 80년대 이후 한국 민중신학이 오랫동안 논의해온 민중(minjung)론을 참조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말하려는 대중(multitude)에 대해 더욱 깊은 통찰을 보여줄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저자들은 이 책을 완성하고 나서도 대중의 정치적 능력을 실천적, 이론적 측면에서 계속 탐구하고 있다고 한다. 부디, 성과 있는 후속타가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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