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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UN 제58차 인권위원회가 6주간을 일정으로 개막하였다.

이번 인권위는 특히 작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번에서 있었던 반인종주의세계회의에서 인권이 국제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것과 동시에 미국 9.11사건 이후 '안보' 대 '인권'이라는 팽팽한 대립구도속에서 각국 정부가 어떻게 인권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는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인권위원회에서는 총 21개의 의제가 다루어졌다. 그 중 4번 의제인 국제인권고등판무관의 보고서에 대한 각국 정부의 입장, 5번 민족들의 자결권, 7번 개발(발전)권, 8번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아랍지역의 인권 문제가 논쟁적으로 다루어졌다.

국제인권고등판무관인 메리 로빈슨의 인사말과 보고서는 반인종회의와 9.11사건이라는 새로운 맥락에서 UN이 인권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 나갈지를 밝히는 단초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메리 로빈슨은 보고서에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1)더번 반인종주의회의의 선언문과 행동계획에 다수의 국가가 동의하게 된 점, 2)테러는 인류 전체에 대한 범죄로써 절대 정당화될 수 없지만 테러에 대한 대처 역시 세계인권선언과 보편적 가치, 그리고 국제 인권 협약의 엄격한 가이드안에서 이루어져야하며, 인권이 보편적으로 지켜지는 것만이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많은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동의'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조금씩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평가들을 내놓았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대다수의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반인종주의회의에 대한 메리 로빈슨의 입장에 일제히 동의를 보낸 반면, 반테러대책에 대한 그녀의 입장에는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었다.

특히 미국과 인도는 그녀의 보고서가 '테러보다는 지나치게 반테러대책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과 '인권이 결코 테러에 대한 완벽한 대책이 될 수 없다'며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 등 다른 국가들도 국가가 국가 안보와 국민 안보에 우선 과제를 두는 것은 주권과 국민을 지키고 영토의 통일성을 지키는 당연한 일이라는 식으로 동조하였다. 이는 체첸과 티벳, 그리고 신장 지역에서의 독립 혹은 자치 운동을 테러라는 이름으로 탄압하고 있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맞서 많은 이슬람 국가들은 테러는 정당화할 수 없지만, 테러의 원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한다며 빈곤과 이슬람 혐오증 등의 주된 이유로 내세우며 서방국가에서 9.11 이후 만연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공격에 대한 대처를 촉구하였고, 7번 의제인 개발권이 국제 사회의 협력속에 조속히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파키스탄을 필두로 한 몇몇 국가들은 '테러'와 '자결권을 위한 정당한 투쟁'은 구분되어야 한다며 국제 사회의 테러에 대한 엄격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등 팔레스타인과 카슈미르 지역에서의 이슬람 투쟁을 정당화를 시도하였다. 유럽지역 국가들은 EU의 이름과 각국 대표의 이름으로 절대적으로 메리 로빈슨의 입장에 동의하는 태도를 일제히 취하여, 미국과 일정한 입장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테러와의 문제에 대한 NGO들의 입장표명은 사실상 아주 극소수의 몇몇 단체들을 제외하고는 실망스럽기 그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인도와 파키스탄쪽에서 온 NGO?들은 자기 정부와 아무런 차별성이 없는 주장을 반복하여 GONGO(어용조직)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빛냈다.

다른 한편 전통적으로 스리랑카의 타밀반군 등을 지원해온 전투적 NGO들은 이들의 투쟁이 정당한 민족들의 자결권 문제라고 정치적 선언을 반복하였다. 이런 정치적 선언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 주장이 과연 인권이라는 스펙트럼에서 인권의 언어로 재구성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선언을 재확인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국제사면기구의 입장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들은 9.11이후 각국 정부들이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인권탄압을 자행하고 있는지 상세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보여주었으며, 또한 인권의 관점에서 현재 어떻게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간결하게 보여주었다. 즉 양적, 질적으로 인권 탄압이 광범위하게 자행되는 것뿐만 아니라, '안보없이 인권없다'는 국가들의 주장이 공포 정치의 분위기로 확산되면서 지난 50년간의 세계 인권의 보편적 기준들이 파괴되고 있는 실로 절대절명의 위기순간인 것이다.

테러에 대한 논쟁은 이처럼 곧 5번 의제인 민족들의 자결권 문제로 이어졌고, 인권위원회의 전통적인 논쟁인 팔레스타인을 중심에 둔 아랍과 이스라엘의 대립, 잠무 카슈미르를 둘러싼 파키스탄과 인도의 대립, 서사하라를 둘러싼 모로코와 알제리의 대립,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대립 등등이 테러와 자결권의 이름으로 지리하게 이어졌다. 이중에서 팔레스타인은 UN의 원죄로써 의제 8번으로 특별히 상정되어 다시 토론되었는데, 유럽 국가들은 다분히 양비론적인 시각에서 이스라엘에 비판의 무게를 좀 더 두었으며, 아랍과 절대 다수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일제히 이스라엘을 비난하며 점령지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편을 든 것은 미국과 함께 유일하게 이스라엘에 대한 성명서 채택에 반대한 과테말라밖에 없었고 캐나다의 경우가 아주 교묘한 양비론속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비판에 무게의 초점을 더 맞추는 경향을 보여 북미와 유럽사이의 정서 차이를 잘 보여주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옹호해 온 유일 강국 미국은 작년 인권위 회원국 투표에서 최초로 떨어져 옵저버 신세가 됐다.

7번 개발권의 토론에서는 북쪽과 남쪽, 즉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사이의 입장 차이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개발을 위해 국제사회의 연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개발의 문제는 각국 정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민주주의, 부정부패청산, 시장경제전면화, 법에 의한 통치 등 소위 좋은 통치가 확립되어야만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개발의 모델과 경험의 공유라는 차원에서도 북-남 협력 보다는 '뉴 아프리카 파트너 십'같은 남-남 협력에 더 무게를 두었다.

이에 반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의 후진국가들은 각국 정부가 일차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재정과 기술 등의 부족 등을 이유로 국제 사회의 협력, 즉 선진국에서의 보다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며 부채 탕감, 선진국의 의류, 옷감, 농산물 등 후진국 산업물에 대한 공정한 시장 개방, GNP대비 0.7를 기부하기로 한 약속의 즉각 이행 등을 촉구하였다.

여기에 한국 정부는 최초로 입을 열었는데 논쟁의 초점과는 상관없는 인권위에서의 개발권의 논의 과정에 대한 동의의 발언에 절대 시간을 할애한 후 겨우 마지막에 각국 정부의 일차적 책임에 무게를 둔 발언으로 마무리를 지어 북쪽의 입장에 지극히 조심스럽게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개발권의 논쟁은 지나치게 거시적인 국가 경제 측면에서만 다루어지면서 실제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한 개발의 문제는 NGO들의 발언에서조차 전혀 취급되지 않는 극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일관하였다. 사실 지금 많은 제3세계 국가에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초국적 기업에 국가가 결탁, 혹은 굴복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촌락을 중심에 둔 경제 기반을 아무 대책없이 뿌리채 완전히 파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초국적 기업의 요구에 따라 한 지역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 버리는 일도 있고, 경영합리화라는 이름으로 물과 전력 등등 기본적인 사회간전자본이 민영화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은 더구나 WTO체제 이후 각국 정부가 초국적 기업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더 급속화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개발은 다시 한번 민중의 입장에서 재정의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NGO들이 그저 거시 경제 차원에만 머물러 가난한 '국가'들과 - '민중'이 아니라! -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그릇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중에 국제 가톨릭 농촌 성인 운동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는데, 이들은 GMO의 확산이 기아를 해결하고 빈곤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이에 대한 선진국에서의 비판은 후진국의 빈곤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배부른 소리라 테크노 세계화주의자들의 주장이 사실은 단지 초국적 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한 것이며 사실상은 영양적인 측면에서도 전혀 생산적이지 않고 사실은 더 낭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결국 테크노 세계화주의자들의 주장이 제 3세계의 농업을 파탄내고 초국적 자본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 빈곤의 문제는 결코 생산의 부족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자원에 대한 배분의 불균형과 가능한 식량과 관련된 여러가지 것들에 대한 접근이 아주 제한되어 있다는 것에서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난한 나라들의 경우에는 GMO 등에서 파생될 수 있는 위기에 대한 대처 능력을 개발할 인적 물적 자원이 극도로 한정되어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GMO문제는 인간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접근되어야 하며, WTO에서 협상되는 것이 아니라 FAO와 WHO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밖에 이번 인권위는 예산 부족으로 인해 저녁과 밤회의가 취소되어 일정 자체가 계속 지연되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이 고작 인권위 안에서의 모든 발언 시간을 일괄적으로 30% 줄이는 것이어서 회의의 부실화마저 현실화되고 있다.

특히 한 안건과 관련된 자료가 6개 공영어로 번역되어 각국에 전달되어야 함에도 영어본 한가지만 일방적으로 각국 정부 대표들에게 배분되고, 그것도 채 모든 정부 대표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안건을 의제에 올려 스페인말을 사용하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커다란 반발을 사면서도 통과시키는 등 운영상의 미숙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다음주에는 사실상 인권위 논의의 절정인 각국 인권의 상태에 대한 보고와 토론, 그리고 정치 시민 권리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다. 한국의 양심에 의한 군입대 거부권 문제도 여기서 다루어질 예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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