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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48년 12월 18일,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소재 다랑쉬 오름 근처에 있는 다랑쉬굴에 피신해 있던 민간인들은 군·경합동토벌대가 굴 입구에 지핀 불의 연기에 숨이 막혀 참혹하게 희생됐다.

희생자들은 학살의 광풍을 피해, 오직 생존을 위해 어지러운 시국만 지나면 다시 농사를 지으며 오손도손 살아보겠다며 호미와 쇠스랑, 곡괭이, 솥, 숟가락을 들고 깜깜한 굴로 숨어들었던 구좌읍 종달리·하도리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44년이 지난 1992년 4월 2일, 제주4·3연구소에 의해 그 참혹한 모습이 드러났으나 정부와 행정당국은 이데올로기로 덧칠하여 다시 한번 희생자들을 죽이고 말았다.

같은 해 5월 15일, 그 억울한 영혼들은 유족들의 뜻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행정당국의 주도 아래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에 한 줌 재가 되어 뿌려졌다. 시신들이 누워 있던 동굴 역시 행정당국은 포크레인까지 동원하여 동굴 입구를 커다란 돌로 틀어막고 흙으로 덮어버렸다.

억울한 영혼을 달래지도 못하고, 진상규명도 이루지 못한 채 '다랑쉬굴 사건'은 역사의 벌판에 버려졌다. 아직도 동굴 속에는 수습하다 남은 유골들의 뼛조각과 그들이 사용했을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쩌면 두 번 죽임을 당해야 했던 영혼들의 원한이 고스란히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다랑쉬굴 사건은 4·3항쟁의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입산 - 참혹한 죽음 - 방치된 시신 - 수장과 봉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는 제주 4·3사건에 대한 모든 모순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4.3 희생자 유골 발굴 10주년 기념 위령제

'다랑쉬굴 발굴 10주년 기념 현장 위령제'가 열린 다랑쉬(월랑봉) 오름 근처 속칭 '선수머셋굴'(다랑쉬굴의 원래 이름)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54년 전 다랑쉬굴에 피신해 있던 민간인 11명이 군·경 합동토벌대가 굴 입구에 지른 불의 연기에 질식해 참혹하게 숨진 지 44년이 지난 1992년 다랑쉬굴 유골이 발굴됐고, 다시 10년이 흘렀다. 다랑쉬 오름 아래 10여 호가 살았던 '잃어버린 다랑쉬 마을터'를 지나 몇 개의 밭고랑과 이랑을 건너고 마을 입구에서부터 설치한 '열두문 저승질'을 모두 거쳐야 그 곳에 다다랐다.

5일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지회장 김상철) 주최로 열린 이날 위령제는 희생자 11명의 유족 8명을 비롯해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0시 초헌관에 유족 고광치 씨, 중헌관에 4.3유족회 이중홍 부회장, 아헌관에 김상철 민예총지회장으로 한 추모제와 참배분향으로 시작됐다.

이어 다랑쉬굴 표석 제막식과 4.3 원혼들을 달래는 위령굿이 현장에서 펼쳐졌다. '살아남은 자들의 흰 그늘'이란 주제로 억울한 영혼들을 맞이한 김윤수 심방(인간문화재 제71호 칠머리당굿 기능보유자)은 위령굿이 2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동안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어 이애주(인간문화재 승무.살풀이 기능보유자) 씨의 열정적인 살풀이춤으로 해원과 상생을 노래했다.

제주작가회의 시인 문무병 씨와 강덕환 씨는 92년 당시 썼던 '다랑쉬굴의 슬픈노래'와 '다랑쉬굴'을 읽어내리는 '시보시'로 화답했다. 이어 풍물굿패 신나락은 잠못드는 원혼들을 달래는 '소리보시'로 영령들의 마음을 쓸어 내렸다.

다랑쉬 유족대표 고광치(61.재경4.3 유족회 감사) 씨는 "당시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에서 유족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다에 뿌려진 원혼들의 한이 쉬 풀리겠느냐"며 "다시는 제주땅에 피맺힌 역사가 되풀이 되지 말고, 이같은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하늘도 원통

다랑쉬 마을터 전역이 제례장소로 치러진 이날 위령제는 굴 현장을 죽음의 공간으로 설정, 이곳에 생명을 불어넣는 위령굿과 살풀이 춤 등으로 원혼들을 달래며 절정을 이뤘다.

이날 다랑쉬 원혼들이 다소나마 해원이 이뤄진 듯 행사내내 보였던 쾌청한 날씨가 행사가 끝나갈 무렵 비로 바뀌자 참가객들은 "하늘도 원통했는지 이제야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며 숙연케했다.

다랑쉬굴 희생자와 이틀전까지 굴 속에서 생활하다 빠져나와 죽음을 가까스로 면한 채정옥(67.구좌읍 종달리) 씨는 "사건이 터지고 이웃주민 2명과 현장에 가보니 굴입구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두 눈을 뜨기가 두려울 만큼의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채 씨는 "돌 구석, 땅속에 코를 파묻고 죽어 있었던 사람들은 눈, 코, 귀에서 피가 나서 형편없었다. 하도리 주민 한 사람은 손톱이 없을 정도로 땅을 파던 모습 그대로 죽어 있었다"며 "그때 직접 11명의 시신을 손수 정리했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아버지와 숙부를 잃은 고광치(61.재경 4.3 유족회 감사) 씨는 "이번 위령제를 마련해 준 시민예술단체와 인권을 존중하고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희생자 박봉관(당시 27) 씨의 유족 이춘자 씨는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주었다는 고마움의 표시로 주최측에 큰 절을 올려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원혼을 달래는 설치 미술조형물

이번 위령제에서 선보인 '설치미술' 분야는 제주의 굿제와 전통 요소를 최대한 활용해 곳곳마다 의미심장한 내용을 나타내 꽤 돋보였다.
다랑쉬 마을터 입구에서 부터 대나무와 한지, 천을 이용해 설치한 '열두문 저승질'은 저승길로 가는 어렵고도 고단한 통과의례를 나타냈다.
행사장까지 길가에 설치한 만장 108개는 4.3 제54주년을 뜻하는 '54조' 또는 불교의 108번뇌를 상징한다.

11개의 돌까마귀 솟대는 제주의 방사탑대신 대나무 솟대위에 돌까마귀를 세우고 11명의 희생자의 신위를 모신 것이다. 솟대와 이어진 하얀목천은 버려진 땅에 생명을 불어넣는 젖줄을 의미한다.

이번에 기획연출을 맡은 박경훈 제주민예총 부지회장은 "발굴 당시 못다한 영령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으로 마련된 이번 위령제는 예술로서 보시한다는 의미를 담았다"며 "예기(藝氣)로 제(祭)를 지내 생명과 정기를 불어넣고 현재 진행 중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의 상징과 이정표가 됐으면 한다"고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다랑쉬굴 (강덕환 시인.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 회원)

얼마나 많은 필설이
그대의 형용을 가능케 하랴
썩어 문드러진 육신틈새로
숨 죽여 지내온 세월이 무심히 흐를 때
뼈마디에 스민 한(恨)
차곡차곡 재워두다가
말보다 진한 침묵으로 다가서던
저 울림

다랑쉬 오름 햇빛 피한 선수머셋굴(주:다랑쉬굴의 원래 이름)
종달리(주:제주도 동쪽 끝마을)에서 상.하도리에서
이름 다르고 나이 달라도
언 손 품속에서 녹여주던
순경, 순환, 두만, 봉관, 명입, 태원, 달룡이
그리고 석순, 성만, 순녀 아지망과
이름 석자 매달아 주지 못한 그 아들

무자년(주:1943년) 동짓달 열 여드렛날
"움직이는 것은 모두 죽여랏"
빗질작전이 삶 터에 들이닥쳐
짚풀 연기 스멀스멀 지펴 놓을 때
입 속으로 콧 속으로 눈 속으로 스며들어
온 몸은 파르르 경련에 떨고
살려 달라 살려 달라 울부짖을 새도 없이
저것 봐라 동굴 바닥에
한 귀퉁이에 새겨놓아 전하고자 했던
역사 증언의 몸부림

마흔 네 해였다네
술 한잔 흩뿌리며 찾아 나설 때
어둠 속에 용해되지 않고
끝끝내 마그마로 흐르다가
눈을 찌르며 달려와
화산으로 분출하던
열 한 구의 주검들

웅얼웅얼 주고 받고 있었다

옆 사람이 그 옆 사람에게
신발이 혁대에게
숟가락이 솥에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다보면
어느 새 다랑쉬 오름
굼부리(주:분화구)만한 마음 나눠 갖던 날들

동토의 공화국에 탯줄 받고 자란 탓에
바람 쓸리는 곳 피한
칠흑의 동굴 속
웅크린 만큼
바깥세상 그리는 꿈도 버리지 않았다

살 맛 나는 시절 오기만 해봐라
일골 살 박이 어린 것 앞장세우고
덜래덜래 고향집 찾아갈 거다
울담(주:제주의 돌담장)으로 식개(주:'제사'의 제주방언) 떡 나눠 먹던
이웃들도 만나 볼 거다

아하, 젯상 받아 앉은 자리에서
산담 두른 봉분에서
목줄 돋궈 당당히 말하자던
악독한 시절의 못 다한 이야긴
한 줌 재도 추스르지 못해
제주바다 푸른 물살에
혼백으로 떠다니더니

기어코 붙잡아 오르는구나
탄탄한 밧줄 질끈 잡고
분단조국을 넘는
구름으로 바람으로 솟구치는구나
썩어 밑거름 자양분 삼아
뿌리를 뻗고 가지를 드리워
너나 없는 세상의 빛살로
이제야 뚜벅뚜벅 걸어 오는구나

덧붙이는 글 | 다랑쉬굴을 발견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다랑쉬굴 사건’을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 것은 유골 발굴과 그 처리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죄스러움 때문이다. 나아가 다랑쉬굴의 진실을 밝혀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다랑쉬굴 유골의 발굴과 처리과정 대해 사실 그대로 기록, 증언함으로써 다랑쉬굴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복원과 함께 현재 진행 중인 4·3 진상규명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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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대자(大者)는 그의 어린마음을 잃지않는 者이다' 프리랜서를 꿈꾸며 12년 동안 걸었던 언론노동자의 길. 앞으로도 변치않을 꿈, 자유로운 영혼...불혹 즈음 제2인생을 위한 방점을 찍고 제주땅에서 느릿~느릿~~. 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 아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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