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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민법정은 배심원평결에 따라 현재의 고교평준화 제도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유지되어야 함을 선고합니다. 땅땅땅"

재판하면 근엄한 판검사와 변호인이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같은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의 평결로 선고가 내려진 판결이 부산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에 배심원제도가 도입되었냐고? 물론 그건 아니다.

제2회 부산YMCA 시민법정이 지난 12일 오후 7시 배심원 11명, 양측 변론인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건번호 2번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서 고교평준화 유지해야하나'를 주제로 열렸다.

판사는 허진호 변호사가 맡았고 청구인측으로는 배종만(전교조) 교사와 김옥순(참교육학부모회의) 지부장, 피청구인측으로는 박증규 교사와 김병선(교총) 교사가 나섰다. 시민배심원은 34명의 배심원단 중 무작위로 선정된 12명이었으나 이날 1명이 불참하여 11명이 배심원석에 앉았다.

평준화폐지는 공교육 파행 부를 것

청구인측은 평준화가 폐지될 경우 중학생들까지 입시지옥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점, 이로 인해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학교의 오후 특기수업이 입시준비를 위해 파행적으로 흐를 염려가 있다는 점, 과외열풍으로 인해 또다시 홍역을 치루게 될 것이라는 점 등을 제기하며 교육이 소수의 인재와 경제력있는 학부모 중심으로 흐르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학과목 중심의 학습을 탈피하여 학생개개인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에니메이션학교나 컴퓨터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 등을 활성화하여 학생들이 성적에 의해서가 아닌 특기와 적성에 따라 학교를 선택해 갈 수 있는 평준화제도로 수정보완하자는 주장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현재 특수목적고가 명문대학을 목표으로 한 입시학원으로 전락한 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평준화가 학력저하, 교육붕괴 낳아

이에 대해 피청구인측은 평준화로 인하여 학력의 하향평준화와 교육에서의 경쟁력 저하 그리고 교육의 붕괴현상 등이 초래되었다고 비판한 후, 학력이 우수한 학생과 열등한 학생을 한 학교와 한 교실에 모아놓은 것은 교사뿐 아니라 학생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고교평준화의 수정과 보완을 통한 점진적인 개혁을 제안하였다.

또한 우수한 학생들이 소수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주역이므로 이들의 지적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교육을 실현함으로써 사교육비의 공교육으로의 유입과 소수의 수재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영재 양성을 위한 특목고의 활성화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 외에도 사학의 자율성과 학생선택권을 인정해야 하고 사학의 재정자율은 공교육의 질적 향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배심원들의 평결

최후 변론을 청취하고 배심원들이 평의실에 다시 모였을 때 2번 배심원(배심원제도에서는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이렇게 부른다)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우리 배심원 11명은 거의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긴장감에 휩싸인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흥분감 그리고 그 중요한 결정을 다름 아닌 내가 내려야 한다는 사실은 그 순간 우리 배심원 11명 모두를 더 없이 소중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배심원들은 먼저 양측의 쟁점이 모호하다는 점, 평결의 기준을 무엇으로 잡아야 할 것인지 등을 논의하며 청구인과 피청구인의 주장을 정리한 후 투표에 들어갔다.

그 결과, 학벌주의나 인맥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성교육의 강화를 위해서는 다소의 문제점이 따르더라도 고교 평준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에 7명이, 각자의 개성과 소질에 맞는 교육 혹은 건전한 경쟁을 통한 효과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비평준화'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4명이 찬성을 표시했다.

평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평결 중에는 화장실도 갈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생리적인 고통을 참으며 내린 결론은 7대4로 고교평준화 유지였다.

시민사회의 판단력 배심원평결

시민법정은 지난 해부터 부산YMCA가 진행하여 첫 회에는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은 유권자혁명인가 불법선거운동인가'를 다루어 배심원평결 6대4로 청구인이 "2000년 부산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은 헌법에서 보장되는 국민 참정권의 구체적인 실현임을 확인한다"는 승소를 이끌어낸 바 있다.

모의재판식의 시도는 곳곳에서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정교한 원칙에 의해 배심원평결을 이끌어 낸 것은 시민법정이 처음이다.

여기에는 소송수행단으로 참여하여 소장작성, 준비서면, 변론서작성, 증거절차 등을 돕는 12명 법대생들의 자원봉사가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소송수행단 하창호(법대생 4학년) 씨는 "직접 경험하면서 개인적으로도 시야가 넓어져 도움이 되고, 판결도 배심원제도가 더 객관적인 것 같아 장기적으로 이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민법정은 앞으로도 호주제폐지, 공무원노조, 성매매여성의 인권, 시민단체후보전술, 배아복제 등 그야말로 뜨거운 주제를 '시민사회'의 평결에 맡겨볼 계획이다.

오문범간사(부산YMCA)는 "지역의 현안, 시민사회의 쟁점을 가지고 쌍방간의 합리적인 토론과정을 거쳐 해결방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힘의 논리와 편법에 의해 사안이 결정되는 우리 풍토에서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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