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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 동양화를 전공하는 스물두 살의 대학생. 아버지와 이혼한 엄마는 열애 끝에 새 가정을 꾸렸고, 함께 살던 아버지의 집을 나오게 된 윤은 할 수 없이 외할머니집으로 왔다. 외할머니는 또 다른 딸의 시어머니인 사돈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다.

윤의 이모가 며느리와 잘 지내지 못하고 집을 나온 친정 어머니와 자신과 맞지 않아 모실 수 없는 시어머니가 같이 지낼 아파트를 얻어 드린 것. 여기에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윤이 합류했으니 외할머니와 사돈 할머니 그리고 외손녀(사돈 처녀) 세 명의 독특한 가족이 구성된 것이다.

종신 보험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아들을 낳고 기른 외할머니는 며느리들과의 사이가 편치 않아 그 분노로 늘 속을 끓이며 매사 날카롭기만 하다. 겉으로는 굼떠 보이지만 자신을 위한 일에는 집요할 정도로 규칙성을 유지하며 자기만을 들여다보는 사돈 할머니. 그 사이에서 윤은 서른 살쯤에 큐레이터가 되는 것과 이십대 전부를 외국에서 보내는 꿈을 꾸고 있다.

어느 날 허리를 다친 외할머니. 작가의 표현 그대로 '마음만 다스리면 되는 한가로운 노년이 태풍에 휩쓸리는 가건물처럼 날아가' 버린다. 마침 휴학을 한 윤은 할머니의 간병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고 그 버거운 짐에 눌린 채 할머니들과 가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병석에 누운 외할머니의 분노는 보험인 줄 믿고 있었던 아들의 캐어(작가는 보호, 간호라는 우리말을 놔두고 캐어Care라 쓰고 있는데, 아마도 그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일부러 고른 것이 아닐까), 더 정확하게는 아들의 여자인 며느리의 캐어를 받을 수 없다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들의 병문안 여부에 얼굴색이 변하는 할머니. 여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아 키웠어도 외로운 할머니. 손녀는 유효 기간이 지난 애정을 고집하는 할머니가 안쓰럽기만 하다.

쉬지 않고 자신을 위한 보약을 끓여대는 사돈 할머니.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르고 요가에 찜질방에 자기를 위한 일에만 파묻혀 사는 사돈 할머니. 외할머니는 늘 사돈 할머니 흉을 보지만 윤은 자신의 고독을 처리해 달라고 떼를 쓰지 않는 사돈 할머니가 나빠 보이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에게 열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사돈 할머니를 보면서, 오히려 윤은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삶의 에너지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외할머니가 퇴원하는 날. 외할머니를 위해 사돈 할머니가 끓이는 사골 국물의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우고, 청소를 위해 처음 들어가본 외할머니 방 벽에 붙어 있는 죽음에 관한 기도문을 보며 윤은 삶에 대해 그토록 오만해 보이던 외할머니 속에 있는 숨은 마음을 비로소 보게 된다.

외할머니와 사돈 할머니의 동거는 이어질 것이다. 서로 다르기에 같이 살 수 있고, 같이 갈 수 있다. 뾰족하게 날선 마음과 푸슬푸슬한 마음은 싸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거기다가 외로움과 무료함, 같이 늙어가는 공감과 연민도 섞여 있으니까. 노년을 어떻게 보낼지는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른 것처럼 각자의 몫이다. 외할머니도 사돈 할머니도 각기 자신의 몫만큼의 노년을 꾸려가고 있을 뿐이다. 이혼한 부모가 또 다시 각자의 삶을 꾸려가는 것처럼.

외손녀를 가엾어 하면서도 재혼한 딸의 인생에 위협이 되지 않길 바라는 외할머니의 숨은 마음을 읽어가며, 스물두 살 여자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사돈 할머니의 넉넉한 품성에 때로 기대가며 윤도 역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그 역시 그 자신의 몫이기에.

(베이커리 남자 / 윤 효 소설집, 생각의 나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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