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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J 의 전성시대 도래하다

한국 방송계의 판도를 바꾼다. 수년전 VJ (비디오 저널리스트)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수많은 매체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던 찬사. 이제 우리는 TV에서 손쉽게 VJ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 방송을 즐겨 보는 VJ 가 미디어 저널리스트 ( Video Journalist)의 약자라는 것은 그다지 난해하지 않은 상식이 되었다.

대학생들부터 고등학생 방송반 친구들까지 6mm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그들만의 저널리즘을 펼쳐 보이는 세상이 정말로 도래한 것이다. TV 화면에서, 또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VJ가 제작한 프로그램을 접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 되었다.

웬만한 일간지 치고 VJ를 다루지 않은 신문이 없으며, 방송사 아카데미들도 VJ 과정을 당연스럽게 개설하고 있다. KBS, MBC, SBS, 서강대 아카데미, 한겨레 문화학교, 외대 VJ 과정, 그리고 각 시민단체들이 개설하고 있는 강좌까지 감안한다면, 매년 정말 적지 않은 수의 예비 VJ 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비디오 저널리스트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만한 지금, 우리는 묘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지 않을 수 없다. - VJ 의 출현이 한국 방송계의 판도를 바꾸었는가? 정말 대중 매체의 찬사처럼, 이 땅의 언론에 긍정적이고 혁신적인 영향을 미친 것일까 ?

VJ를 생계로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비디오저널 리스트 아카데미 과정의 첫 강의라면 듣게 되는 구절은 VJ의 환상을 깨기에 충분하다. - "VJ를 생계로 생각하지 말자.", 이 말은 한국에서 VJ가 대중화된 이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VJ의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그 대중화의 시기는 대체로 IMF 와 시작을 같이 한다. IMF의 도래는 방송사의 재정 상태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했다. IMF와 함께 방송사의 주 수입원인 광고비의 하락이 이어졌고, 방송프로그램 제작비도 약 30% 선으로 삭감되면서 연이은 하강을 계속했다. 각 방송사는 저 예산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고,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원맨제작 시스템.

ENG (Electronic News Gathering) 카메라의 제작 시스템은 최소한 4-5 명의 스텝이 필요한 반면, 그다지 보수에 연연치 않는 열정어린 외주 VJ는 단 한명이면 충분한 것이다. 결과는 두말할 것 없는 제작비의 절감.

이렇게 낮은 예산으로 빠르게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특징 덕분에 원맨제작시스템은 표준제작비항목에 정규항목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일본에서 개발된 소니사의 6mm 디지털카메라 (VX시리즈) 기종이 국내에 널리 보급되어 필수 품목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VJ 하면 원맨 시스템을 떠올리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이 단어에는 VJ 에 대한 오해와 비극이 내재되어 있다.

한국 방송계에서 PD나 작가들이 이해하고 있는 VJ는 "소형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방송국이 원하는 장면을 촬영해 영상을 제공해 주는 카메라맨"이다.

결코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기자, 즉 저널리스트가 아닌 것이다. 묘한 사실은 한국에서 VJ를 되고자 하는 이들도 'VJ'가 되고자 할 뿐, '기자'가 되고자 한다는 의식은 부재하다는 것이다. 홀로 영상을 제작하고, 편집하여 제공할 수 있다는 기능적 측면에서 VJ를 이해할 뿐이다.

이러한 VJ 의 입지는 비극을 낳는다. 영상의 제공은 영상을 필요로 하는 - 엄밀하게 말한다면 비용을 치르고 구입할 의사가 있는 - 주체가 존재할 때 가능해진다. 수적으로 제한된 영상의 구매자 (방송사) 는 다수의 VJ를 앞에 두고 얼마든지 장난을 칠 수 있다.

짧은 시간에 더 재미있고, 더 많은 양의 영상물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칙은 수많은 VJ들을 이 시대의 영상 노동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접하는 TV 화면은 이제는 진부하고 자극적인 소재로 가득차 버린다.

왜 음식점만 취재하냐는 질문에 한 VJ 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음식점 취재는 취재성공률이 100%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미 제도권에 소속된 VJ들에게는 취재의 실패를 두려워할 여유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예비 VJ들은, VJ를 생계로 생각하지 말자는 우울한 구절을 되새기며 그들을 어려운 길을 시작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싫다면 '장농속의 카메라'를 하나 더 늘려가는 수 밖에 없다.

VJ 는 기자다

비디오 저널리스트 ( VJ ) 란 소형 비디오 카메라를 가지고 기획, 취재, 편집, 기사 작성, 리포팅을 혼자서 수행하는 기자다.

아시아프레스의 리더인 노나까 아끼히로가 마약왕 쿤사를 취재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두 시간만에 캠코더를 조작하는 방법을 익혔다는 일화는 VJ들의 신화처럼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노나까는 카메라를 잡기 이전에 이미 저널리스트 수업을 마친 상태였으며 제도 언론의 한계를 느끼고 그 대안을 모색해오고 있었던 터였다.

VJ를 거론할 때마다 인용되는 미국의 마이클 로젬블럼은 "저널리스트에게 카메라를 주라, 그러면 세계 최고의 저널리즘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기존의 문자형 저널리스트가 이제는 영상 저널리스트, 즉 VJ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구절인 것이다.

이들은 피취재자를 심도있게 이해하고, 높은 주제의식이 함양된 제작물을 촬영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로서 VJ를 정의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해 취재한 영상소재만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캄저널리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해 분명하게 구분짓고 있다. 그러나 충격적이거나 흥미로운 영상을 취재했다는 사실만으로 취재 활동을 완결지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캄저널리스트의 활동은 비디오저널리스트의 수행 활동의 일부분일 뿐 그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저널리스트에게는 문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곡된 VJ의 자화상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상할 정도의 VJ 의 경제적인 측면만이 부각되어 왔다. 값싸게, 적은 인력으로 영상 컨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방송사에게 매력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방송사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일 뿐이다. 그러한 특징이 시청자에게 특별한 효용을 제공해 준다는 법칙은 없다. 아울러 한국 방송 환경을 더욱 윤택하게 한다는 논리도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VJ를 다루는 기사들은 더욱 화려한 미사어구로 치장하곤 했다. 일인 취재를 통한 제작비의 절감은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고 했으며, 다수의 취재진에 의한 왜곡의 감소, 장기간의 밀착 취재의 용이성등에 대한 이야기가 화려한 장밋빛 색채를 띄고 등장하곤 했다. 심지어 신자유주의 시대의 방송 환경에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VJ 에 대한 이야기도 논의되곤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술의 발전은 고용감소를 초래한다는 명제는 이 분야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용된 노동자의 입장에서 VJ 와 같은 저예산 저인력 시스템은 기존 고용 구조의 악화를 의미할 수 있다.

1인 제작 시스템은 당연히 자본의 입장에서 고용의 축소를 떠올리게 할 법 하다. 때로는 카메라맨이, 때로는 PD 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남은 이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속적인 노동강도의 강화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그램의 질이 상승할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일인작업이 다수의 인력보다도 취재자의 의도를 더욱 잘 반영할 것이라는 시각도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 현대 사회에서의 미디어의 통제는, 제작방식이 팀 작업이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통제 또는 자본의 힘에 의해서 좌우되기 쉽기 때문이다.

오히려 각기 분산되고 독립된 VJ 들은 이러한 권력에 의해 더욱 취약하게 노출되고 조작될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보면 강력한 권력의 입김에서 취재의도를 보존할 수 있는 이들은 전문가 집단, 즉 취재집단이 되어야 하는데, VJ 들의 시스템은 이러한 집단의 고립 및 분산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선정성이 강한 소재주의, 조악한 형태의 베리떼 스타일의 작품들의 양성은 이러한 우울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굳이 난해한 저널리즘을 거론할 것까지 없이, 소명의식이나 피취재대상자에 대한 깊은 이해나 애정의 결여와 VJ시스템을 가능케 하는 기술력의 결합이 탄생시킬 수 있는 우울한 영상이 이미 TV 화면을 장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선택의 기로

초창기 VJ의 출현은 미디어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대변해줄 해방의 무기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 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VJ는 오히려 기존의 방송사의 자본구조를 더욱 강화시키고, 그들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도구로 작용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방송사의 전문가집단의 힘을 약화시키고, 경영진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도구로 군림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VJ는 지속적으로 구매자가 원하는 영상을 찍어내는 노동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VJ가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저항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자유주의의 도구 정도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매체 다채널시대의 이념으로 무장된 거대한 언론 재벌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영상물을 만들어내어야 하는 VJ 들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동안 이루어져온 대중매체에 의한 비디오저널리스트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찬사 그리고 감추어져 온 그들의 어두운 실태,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비판되고 있는 조악한 영상물의 방영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다매체 다채널 시대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시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가까운 미래에 펼쳐지게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좀 더 우월한 입장에서 영상제작인력 - 고용주와 결코 대등할 수 없는 -을 제공받기 위한 거대한 판짜기의 일환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이 이미 거대한 네트워크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해외언론사와의 경쟁을 위한 경제논리와 결합할 때 그 폐해는 상상외로 커질 수 있다.

비단 이것은 VJ 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영의 논리가 언론 자체의 논리를 구축할 때, 그리고 이것이 정당화될 때, 우리 사회의 비극은 가시화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VJ 의 의미는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효율성이라는 경제적 구호 뒤에 감추어져 있던 VJ 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할 시기이다. 방송은, 그리고 저널리즘은 단지 경제적 효율성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저렴한 가격에 영상물을 제작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영상물 자체가, 뚜렷한 주관없이 생산된 조악한 대량생산품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영상으로 쓰여진 기사는 당연히 자본에 종속된 노예가 아닌, 당당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기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이제 단지 6mm 카메라만 있다고 해서 VJ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은 부정되어야 한다. VJ 는 사진촬영기사가 아닌 기자다. 기자는 기자의식이라는 것을 가진다. VJ 도 VJ 로서의 기자의식을 키워 볼 때가 아닌가 한다. 이제 뉴미디어 시대를 맞아, 방송인력에 대한 수요와 함께 출현할 그들의 후배들을 영상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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