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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드리는 필자의 말] '어느 시골군수 이야기' 첫 번째 글에 대한 독자들의 깊은 관심과 열띤 의견 표명에 감사드린다. 지지와 우려와 비판이 교차한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필자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적지 않은 교훈과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현재 필자는 한달 가까이 명성황후의 비극적 최후와 관련된 취재를 진행하고 있는데, 거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 기사를 마무리하는 대로 별도의 글을 통해 독자 의견에 대한 필자의 느낌과 견해를 솔직하고 성실하게 개진할 생각이다. 일단 첫 번째 글에서 약속한대로 두 번째 글을 싣는다.
| | ▲ 남해대교. | 김두관 전 남해군수(이하 직위 및 존칭 생략)는 세 번의 '점프'를 했다.
서울에서 민통련 간사로 일하던 당시의 예기치 못했던 '투옥', 중앙이 아닌 풀뿌리에서 새로운 희망과 대안을 만들겠다는 깨달음 뒤에 결단한 '귀향', 마을 이장과 지역신문 사장을 하며 얻은 민심의 요구 끝에 결정한 군수 '출마'가 바로 그것이다.
김두관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당선 이후 패기와 결단으로 풀뿌리 정치의 진수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다시 네 번째 '점프'를 시도하고 있다. 다음은 '젊은 시골군수'로서 그가 지난 7년 동안 전개해온 '풀뿌리 자치혁명'의 기록들이다.
옹폐부달(壅蔽不達) 민정이울(民情以鬱) 사부소지민(使赴 之民) 여입부모지가(如入父母之家) 사양목야(斯良牧也): 막히고 가려져 통하지 못하면 백성의 사정이 답답하게 된다. 와서 호소하고 싶은 백성이 부모의 집에 들어오는 것같이 해야 훌륭한 목민관이다―형전육조(刑典六條) 청송(聽訟)
『목민심서』 봉공육조(奉公六條) 예제(禮際) 편에는 "읍례(邑例)라는 것은 한 고을의 법이다. 그 중에 이치가 맞지 않는 것은 고쳐서 지키도록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정약용은 "취임한 지 몇 달이 지나거든 여러 고(庫)의 절목들을 조목조목 조사하고 물어서 그 이롭고 해로운 것을 알아내어, 그 중에 이치에 맞는 것은 표시하여 드러내고,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김두관이 군수에 취임한 뒤 전국에서 최초로 도입한 '민원공개법정'은 바로 그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고쳐서 지킨다"는 정약용의 충고를 현대사회에 적용한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것은 그가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주민참여'와 '공개행정'을 구체화시킨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김두관이 이 제도를 도입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기득권 세력의 눈치를 보느라 일반 주민들이 느끼고 있는 불편과 불이익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오죽 답답하면 군수님을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했겠습니까? 지금 몇 년째 종패를 뿌리고 있는데 아직 한번도 제대로 수확한 적이 없습니다. 어장이 완전히 썩어버렸다니까요. 좀 잘 되는 어장, 사이좋게 같이 하면 안 됩니까?"
군수에 취임하자마자 주민들의 안타까운 하소연이 계속 접수됐다. 김두관은 담당 공무원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은 뒤 이렇게 물었다.
"김 계장님. 그 강진만에 여유 공간이 좀 남아 있습니까?"
"있긴 있는데요. 거기서 몇 년째 해온 사람들이 워낙 강하게 버티고 있어서 말이죠. 잘못 건드리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
그렇다고 기득권의 저항이 두려워 불공평한 일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군수가 심판관을 맡고 주민대표, 전문가, 공무원이 동등한 비율로 배심원을 구성한 뒤 공개된 장소에서 군민 전체의 이해가 걸린 집단적이고 고질적인 민원을 결정하는 제도, 즉 '민원공개법정'은 그래서 도입됐다.
| | ▲ 주민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민원을 공개된 장소에서 투명하고 공정하게 결정하는 제도인 '민원공개법정'. 동등한 비율로 주민 대표, 전문가, 공무원이 배심원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결정에 대한 분란은 있을 수 없다. | 공개적이고 투명한 민원처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법정에서 결정된 사항은 즉시 행정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목민심서』 공전육조(工典六條) 천택(川澤) 편에는 "토호와 귀족이 수리를 제멋대로 하여 자기 논에만 물을 대는 것은 엄금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정약용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소개한 바 있다.
"왕제가 용계주부로 보임되었을 때, 그 고을에 수백 경에 달하는 저수지가 있었다. 이에 앞서 마을의 토호가 세를 바치고 그 저수의 이득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왕제가 그것을 모두 찾아서 물을 끌어다가 백성들의 논에 대어 주었다. 이로부터 그 마을에 심각한 가뭄 걱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정약용은 형전육조(刑典六條) 청송(聽訟) 편에서는 "토지의 소송은 백성의 재산에 관계되므로 한결같이 공정하여야 백성이 이에 승복한다"고 했거니와, 공정하게 진행되는 '민원공개법정'을 통해 어장 이설권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됐음은 물론이다. '민원공개법정'에서 인근의 적자 어장들을 강진만의 공유수면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정이 나온 것이다. 이 사건은 반농반어(半農半漁)로 먹고사는 다수의 주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권분야자(勸分也者) 권기자분야(勸其自分也) 권기자분(勸其自分) 이관지성력다의(而官之省力多矣): 권분이란 그 스스로 나누어 주도록 권하는 것이다. 스스로 나누어 주도록 권하면 관의 힘을 덜게 되는 것이 많다―진황육조(賑荒六條) 권분(勸分)
남해군은 지금까지 '민원공개법정'을 통해 어장 이설권 문제는 물론이고 마을버스 운행허가권, 마을공동묘지 공원화 시범사업의 결정 등 주민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현안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민원공개법정'을 지켜보다 보면,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소개한 다음과 같은 고사가 떠오른다. 물론 사안의 성격이 위에서 살펴본 남해의 공개법정과 다르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송사'가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점에서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송나라의 고헌지가 건강 현령이 되었을 때에 소도둑이 있어 그 본래 주인과 소를 놓고 다투었다. 고헌지가 소의 고삐를 풀어주어 소 가는 대로 놔두었더니 소는 곧장 자기 주인집으로 돌아가고, 도둑은 벌을 받게 되었다."
봉건시대에는 목민관 개인의 지혜가 중요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단체장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다. 합리적 시스템을 통해 지역공동체 다수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 '민원공개법정'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마련된 제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김두관이 군수에 취임한 뒤 도입한 제도는 수없이 많다. 남해군이 발주하는 각종 공사에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주민공사감독관제', 220명 이상의 주민만 요구하면 성립되는 '감사청원제도'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행 지방자치법에는 감사청구가 가능한 기준이 주민 총수의 50분의 1로 규정되어 있다. 인구 6만의 남해는 1천여 명이 넘어야 하지만 이를 대폭 완화한 것이다. 쉽게 말해 관청이 주민의 감시를 더 많이 받겠다고 자청한 셈이 된다.
특히 김두관은 어떤 정책을 입안하거나 사업을 추진하더라도 반드시 '주민참여'의 원칙을 관철시키려 노력했다. 1997년 2월에 조례를 제정하고 한 달 뒤 50명의 주민들이 위원으로 참여하여 정식으로 출범한 '환경보전위원회'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독립적인 환경단체이자 남해군의 자문기관이라는 위상을 갖고 있는 환경보전위원회는 환경시책 개발과 환경오염 감시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푸른남해 환경선언'과 '푸른남해21' 제정에도 앞장섰다.
예술인촌 추진위원회, 가족휴양촌 추진위원회, 21세기 남해발전 기획단, 남해군 월드컵캠프 범군민유치위원회 등도 '주민참여' 원칙에 따라 구성된 단체들이다. 정약용이 진황육조(賑荒六條) 권분(勸分) 편에서 "고을의 덕망 있는 사람을 골라 날짜를 잡아 모이게 하여 그들의 공론을 들어 요호를 정한다"고 강조한 것을 연상케 한다.
봉산지송(封山之松) 영적후기(寧適朽棄) 불가이청용야(不可以請用也): 봉산의 소나무는 차라리 썩어서 버리더라도 사용하기를 청할 수는 없다―공전육조(工典六條) 산림(山林)
'봉산(封山)'이란 나라에서 쓰기 위해 수목의 벌채를 금한 산을 말한다. 김두관은 군수가 되기 이전부터 절경을 이루고 있는 남해의 산과 바다를 일종의 '봉산'으로 여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남해의 미래를 위해서는 '개발'보다 '환경'이 중요하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두관이 다른 자치단체장과 가장 큰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사실 지역에서 '개발'보다 '환경'을 정책의 방향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일반 주민조차 여전히 많은 다리와 도로를 놓고 공장을 세우는 의원이나 군수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제철소가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군수의 신분으로 시위 주동자가 됐던 김두관은 매우 특이한 단체장임에 분명하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남해를 맑고 푸르게 가꾸겠다는 것이 주민들과 공유한 약속이었습니다. 공무원과 주민들도 환경오염을 가져올 수 있는 공장을 짓는 것보다는 남해의 천혜적 환경을 지키면서 관광과 농수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지요. 이런 동의를 기초로 수립한 것이 바로 '남해그린플랜'이었습니다."
남해군의 그린플랜은 마침내 1997년 12월 환경시범도시 지정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환경부가 주관한 심사에서 전국 234개 기초자치단체 중 3위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합격한 것이다. 이때부터 남해군은 환경부로부터 예산은 물론이고 정책적인 지원도 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정약용은 율기육조(律己六條) 절용(節用) 편에서 "하늘과 땅이 물건을 낳아 사람으로 하여금 누려 쓰게 하였다. 하나의 물건이라도 버림이 없도록 하여야 이를 일러 재물을 잘 쓴다고 할 수 있다"는 대목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런 점에서 정약용이 소개한 다음과 같은 고사는 흥미롭다.
"선조 때 윤현은 호조판서가 되어 못쓰게 된 자리, 땅에 까는 자리, 청연포 등을 모두 창고 속에 저장하니 뭇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그후 못쓰게 되는 자리는 조지서(造紙署)에 보내서 맷돌에 갈아 종이를 만드니 그 품질이 가장 좋았으며 청연포는 예조에 보내어 야인의 옷띠를 만들었다."
| | ▲ '개발'보다 '환경'을 우선적으로 정책에 반영해온 남해군은 환경부가 주관하는 제1회 '환경경영대상'(지방자치단체 부문)을 수상했다. <경남신문> 1999년 5월 29일자. | 그런 점에서 볼 때 김두관이 야심적으로 추진해온 에코파크(Eco-Park)는 다양한 환경정책을 현실공간에 직접 구현해 놓은 전시장이자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해읍 남변리에 조성된 에코파크는 환경, 농업, 관광 등 세 가지 테마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공간이다. 이곳에는 하수종말처리장, 음식물쓰레기처리장, 농어촌폐기물종합처리장이 들어섰거나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아울러 한쪽에는 자연생태계의 자정작용을 응용한 수초골재식 간이오수처리장도 설치돼 있다.
2001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음식물쓰레기처리장도 주목을 끈다. 가정에서 배출된 음식물쓰레기는 이곳으로 운반돼 지렁이에게 먹일 사료로 가공된다. 이 사료를 먹은 지렁이는 분변토를 배출하고, 양질의 천연비료인 분변토는 환경친화적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지역 농민들에게 공급된다.
범조귀사서(凡朝貴私書) 이관절상탁자(以關節相託者) 불가청시(不可聽施): 조정의 고관이 사적으로 편지하여 관절로 하는 청탁을 들어주어 시행해서는 안 된다―율기육조(律己六條) 병객(屛客)
천혜의 환경을 적극 보존하겠다는 남해군의 의지는 현재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장묘문화 혁신운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실제로 정약용은 호전육조(戶田六條) 전정(田政) 편에서 "사람들이 풍수설에 빠져 산에 빈 혈이 없으면, 평지에 묏자리를 마련한다. 이에 비옥한 토지가 묏자리가 되어 나라의 토지가 날로 축소된다"고 우려한 바 있다.
| | ▲ 남해군이 '불법묘지 없는 마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단위 공원묘지를 사전에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상일보> 1998년 7월 31일자. | 김두관은 묘지강산이 되면 관광지로서 남해의 이점이 사라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불법묘지와의 전쟁'을 벌였다. 여기엔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불법묘지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방향으로 개정된 장사법(葬事法)이 시행에 들어간 것은 2001년 1월 13일이다. 이 법에 따르면 우선 개인묘지를 쓰려는 사람은 30일 이내에 신고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불법묘지로 판명되면 해당 관청은 고발조치와 함께 행정처분을 내려야 한다.
다시 말해 고발을 당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과 1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고, 3백만 원 이하의 과태료도 물어야 한다. 법적 효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행정처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5백만 원의 이행강제금을 물어야 하는데 6개월마다 반복해서 부과된다.
개정된 장사법만 제대로 시행해도 묘지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실제로 이렇게 강력한 장사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불법묘지 비율은 여전히 80%를 웃돌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법률과 현실이 일치하는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먼저 중앙정부의 행정의지가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선에서 법률을 집행해야 할 자치단체장들이 코앞에 닥친 선거를 의식해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불법묘지와의 전쟁'이라는 남해군의 실험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장사법이 시행에 들어간 날로부터 4개월 만에 불법묘지 비율을 80%에서 0.8%로 끌어내린 반면 화장 비율은 10%에서 23%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렇다면 남해군이 이런 놀라운 성과를 올린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려면 남해군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제도인 '사설묘지 적법여부 사전확인제'를 살펴봐야 한다. 이는 사설묘지를 쓰려는 주민들이 적법 여부를 문의하면 담당 공무원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현지실사와 관련법 검토 등을 통해 즉석에서 판단을 내려주는 제도이다.
남해군은 이 제도의 도입으로 주민들의 민원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불법묘지 사전예방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사전확인제를 이용했던 남해군 주민 박명수 씨(67)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처음에는 나도 급작스러운 '법 바람'에 불만을 느꼈지만 지금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주민들이 논이나 밭에도 맘대로 묘지를 썼지만 지금은 엄두도 못 냅니다. 솔직히 후손들의 장래를 위해선 이런 법이 진작 만들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장사법 시행 초기에는 각종 유언비어가 나돌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타 시·군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데 유독 남해군만 심하게 간섭한다"는 말이 가장 많았다. 심지어 "나라에도 없는 법인데 군수가 독단적으로 조례를 만들어 단속한다", "조상도 몰라보는 김두관을 다음 선거 때 반드시 떨어뜨려야 한다" 등의 근거 없는 음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변에선 스스로 적을 만드는 그를 가리켜 '바보 김두관'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해군의 정책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담당 공무원 김성근 씨(38)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남해군이 '불법묘지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운동을 전개한 이후 불법묘지는 단 2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전직 관료나 유지입니다. 그들은 사전확인제를 통해 불법묘지임이 확인됐는데도 사설묘지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청탁을 하기도 합니다. 안 된다고 하면 이번에는 서울의 언론사나 감사원 등에 근무하는 친척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지요. 그러나 설사 대통령이 회유하거나 압력을 넣는다고 해도 특혜를 줄 수 없다는 것이 남해군의 행정원칙입니다. 좁은 지역에서 특정인의 사정을 봐주다 보면 금방 소문이 퍼지게 되고, 그러면 '장묘문화 혁신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남해군은 장사법에 따라 불법묘지를 쓴 사람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표가 떨어져도 할 일은 한다"는 김두관의 행정원칙을 믿고 담당 공무원들이 용기를 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법묘지에 장사를 지낸 상주가 공무원들의 간곡한 설득 끝에 이미 땅에 묻었던 관을 꺼내 공원묘지로 이장하거나, 사설묘지를 쓸 수 없는 국립공원 안에 있는 섬 주민이 배를 이용해 바다 건너 공동묘지로 상여를 옮긴 사례도 있었다.
이 사건들을 모두 지켜본 뒤에야 주민들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문제는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그것을 집행하는 행정 주체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목민심서』에는 법률과 관련한 청탁이나 외압을 받더라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봉공육조(奉公六條) 수법(守法) 편의 "나라의 법이 금하는 것과 형률에 실려 있는 것은 마땅히 조심조심 두려워하고 감히 함부로 어기지 말아야 한다", 형전육조(刑典六條) 금포(禁暴) 편의 "호강(豪强)을 쳐서 누르고 귀족의 측근을 꺼리지 않는 것 또한 목민관이 힘써야 할 바이다" 등의 대목이 바로 그렇다.
의어본읍(宜於本邑) 사일장책(思一長策) 건일공전(建一公田) 이방사역(以防斯役): 마땅히 그 고을에 하나의 좋은 계책을 생각하거나 공전을 설정해서 민고의 역을 충당해야 한다―호전육조(戶典六條) 평부(平賦)
남해군이 그린플랜 중의 하나로 추진한 것 중의 또 하나는 학교 운동장에 사시사철 푸른 잔디를 조성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귀족화된 잔디를 대중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이기도 했다. 상류층이 주로 애용하는 골프장이 상징하듯 한국에서 잔디는 특별한 사람만이 밟을 수 있다. 그것은 잔디를 조성하는 비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남해군은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잔디를 조성하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남해군 공무원들이 김두관의 특명을 받고 독일과 스위스 등 유럽까지 답사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들여온 잔디를 남해 기후에 맞게 적응시키는 등의 오랜 연구 끝에 마침내 '남해잔디'를 개발했다. 공설운동장과 10여 개가 넘는 관내 학교 운동장에 이 잔디가 조성됐다.
그리고 '남해잔디'는 남해라는 고을의 '하나의 좋은 계책'이 되었다. 때마침 한일 월드컵 공동유치가 성사됐거니와, 실제로 김두관과 남해군을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월드컵이다.
"국가대표 훈련캠프 한국 남해로 결정".
2001년 12월 2일자 덴마크 주요 신문과 방송에 큼직하게 보도된 기사의 제목이다. 그것은 한국의 한 시골마을이 일본과 한국의 수많은 대도시를 제치고 유럽의 축구강호 덴마크의 훈련캠프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월드컵 개최도시가 아닌 자치단체 중 훈련캠프를 유치한 곳은 강릉, 천안, 성남, 남해 등 네 곳에 불과하다. 그나마 농촌의 군 단위 자치단체로는 남해가 유일했다. 더욱이 남해는 이 과정에서 덴마크에 별도의 유치금을 제공하지 않고 당당하게 계약해 주목을 받았다.
일본과 한국의 대다수 도시들이 5∼13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액수의 유치금을 별도로 지급하거나 호텔 숙박비를 저렴하게 한다는 등의 조건으로 유치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실제로 덴마크는 숙식비, 차량임대료, 세탁비 등 선수단과 관광객이 남해에 머물면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정상적으로 지급하기로 계약했다.
그뿐 아니다. 캠프기간 중에 덴마크 대표선수들이 초등학교를 방문해 축구교실을 여는 것은 물론이고 두세 차례의 한국 프로팀과의 친선경기, 본선 참가국 중 한 팀을 남해로 초청해 연습경기를 갖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만약 이 경기가 성사된다면 군 단위 최초로 A매치 경기를 유치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동시에 남해와 덴마크는 양국간 친선교류를 추진하는 한편 남해군 주민들과 덴마크 응원단이 공동으로 문화축제를 연다는 데도 합의했다. 이에 따라 남해는 덴마크가 머무는 3주 동안 약 40억 원의 관광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우선 다른 도시보다 빨리 유치운동에 들어간 것이 주효했다.
2000년 6월의 어느 날. 김두관은 남해군 훈련캠프 유치운동 실무자들과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를 방문했다. 남해에 캠프를 유치하는 일에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들은 위원회 관계자로부터 "왜 이렇게 벌써부터 서두르느냐"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해가 그만큼 발빠르게 움직였다는 반증인 셈이다. 더욱이 남해는 그보다 한달 전에 이미 홍보책자를 전 세계 축구협회에 발송한 상태였다.
| | ▲ 체육선수 전지훈련의 메카가 된 남해군은 '스포츠마케팅'의 전형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간스포츠> 1998년 3월 3일자. |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해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스포츠 기반시설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김두관은 이미 6년 전부터 공설운동장과 학교운동장에 사철 푸른 잔디를 저렴한 가격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때마침 월드컵 한일 공동유치가 결정되자 김두관은 '남해잔디'를 월드컵과 연계하여 수익사업으로 발전시키는 전략을 수립했다. 바닷가에 버려져 있던 서상매립지에 '스포츠파크'를 조성한 것도 바로 그 사업의 일환이었다. 남해군은 현재 사계절 내내 이용이 가능한 풍부한 잔디운동장을 활용해 축구와 야구 등 프로스포츠 경기나 전지훈련은 물론이고 전국 어린이 축구대회, 시민사회단체 체육대회까지 유치해 왔다.
'남해잔디'는 이제 전국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차범근, 허정무, 신문선 씨 등 각 방송사의 축구해설가들이 TV에서 축구중계를 하면서 잔디 문제만 나오면 '남해잔디' 이야기를 할 정도다. '스포츠마케팅' 연구자들에게도 남해의 사례는 좋은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이 한 시골군수의 '월드컵 십만양병론'이 빛을 보게 된 전말이다.
상사이비리지사(上司以非理之事) 강배군현(强配郡縣) 목의부진이해(牧宜敷陣利害) 기불봉행(期不奉行): 상사가 이치에 어긋난 일을 강제로 군현에 배정하면 목민관은 마땅히 이해를 두루 개진하고 받들어 시행하지 않도록 한다―봉공육조(奉公六條) 공납(貢納)
한편 김두관은 지방자치의 권한을 축소하려는 중앙정치권의 국회의원들에게 겁 없이 맞섬으로써 '지방자치 전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2001년 후반 무렵의 일이었다. 행정자치부가 '부단체장 국가직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가운데 이재오, 임인배, 김덕배, 남경필 의원 등 국회의원 42명이 '지방자치단체장 임명제 법안'을 발의한 적이 있다. 지방자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이러한 흐름에 제동을 걸고 나선 주인공이 바로 김두관이었다.
당시 <100분토론>에 출연한 그는 "단체장 중 일부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제도 자체를 없애자는 것은 쥐를 잡자고 독을 깨자는 것과 같다"면서 "중앙정부가 너무 과도하게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지방자치 위기의 본질임을 알아야 한다"고 역공했다. 아울러 그는 "국회의원들이 그런 퇴행적 법안을 낸 진짜 이유는 기초자치단체장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던 화려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자치단체장 대표 자격으로 TV토론에 나가 중앙정치권을 질타하는 그의 모습은 일본의 호소카와 전 총리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나라가 변하지 않으면 지방에서 변해 보이겠습니다."
호소카와가 구마모토 현지사로 나서면서 했던 말이다. 1971년 33세의 나이로 참의원에 당선된 그는 재선에 성공하며 자민당 의원부간사장과 대장정무차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이른바 '잘 나가는 중앙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지방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83년 참의원 직을 때려치우고 고향인 구마모토 현지사에 출마한 것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정계에서 승승장구하던 호소카와. 그가 45세의 나이에 스스로 '중앙' 대신 '지방'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아무리 애써도 도무지 바뀌지 않는 '나가타쬬(永田町)의 논리'에 지쳐버렸습니다. 나의 꿈은 내 손으로 실감할 수 있는 성과를 찾고 있었습니다. 나의 꿈이 부풀면 부풀수록 중앙정계의 정체에 염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방에서 소신껏 에너지를 발산해 보고 싶었고 '장대한 내 소신'을 실천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가타쬬의 논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여의도 정치'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여의도에 국회의사당, 국회의장 공관, 의원회관, 민주당·한나라당 당사가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것처럼, 도쿄의 나가타쬬에도 국회의사당, 수상 관저, 의원회관, 자민당·사회당 본부가 자리잡고 있다.
나가타쬬는 '일본정치의 1번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일본에는 "나가타쬬의 상식은 국민의 비상식"이라는 말도 있다. 일반 국민의 정서와 철저하게 괴리된 일본의 중앙정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젊은 정치인' 호소카와는 바로 그 '일본정치의 1번지'와 결별하고 지방에서 자신의 '장대한 소신'을 펼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변화와 도전을 거부하는 중앙정치와 과감하게 결별하고 '지방정치의 1번지'를 풀뿌리에서부터 새롭게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여의도 정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희망을 어쩌면 '여의도'가 아니라 경남 남해를 비롯한 '풀뿌리'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 '풀뿌리 정치'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태도와 의식은 이중적인 것이 사실이다. 주민의 삶과 직결된 풀뿌리 정치가 중요하고 중앙정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방선거 때조차도 결국 중앙정치권에서 유도하는 지역주의의 영향을 받아 투표해 오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생각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닐 수 없다. 맨날 중앙정치권과 정치인을 욕하면서도 평소에 밑바닥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풀뿌리 정치인에 대한 관심과 육성에는 무심했던 것이 우리의 솔직한 초상이었다.
미국의 클린턴, 독일의 슈뢰더, 영국의 블레어, 일본의 호소카와….
이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들 지방에서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정치적 역랑을 키운 뒤 국가 전체의 행정과 개혁을 책임지는 지도자로 변신한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정녕 한국에서는 마을 이장 출신의 군수들과 도지사들과 대통령들은 나올 수 없는 것일까?
그 물음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되고 있는 경남도지사 선거에 나선 '시골군수' 김두관을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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