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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자꾸 늙어가고, 정신은 어디 두고 온 듯 깜빡하기 일쑤이고, 귀는 어두워지고, 모아 놓은 돈은 투자 회사의 부도로 날아가고, 기르던 고양이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평생을 바쳐 해온 일인 연극에서는 밀려나고, 그래서 불안하고 외롭고 초조하고 노엽기만 하다. 주위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는 것도 싫다.

외동딸은 미국에 살고 있고,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고, 연기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아서 미국에 오라는 딸의 청도 물리치고 홀로 살아가고 있지만 힘들기만 하다. 과거의 명성은 삭막한 현실에 대한 탄식과 아쉬움에 묻혀 빛바랜 채로 남아 있다. 70대 중반의 노배우 황포 선생은 끊임없이 죽음의 유혹을 느낀다.

원로 배우 장민호 선생의 자서전적 연극으로 지난 해 공연에서부터 눈길을 끈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40여 년간 연극계에서 함께 해온 원로 극작가 이근삼 선생의 헌정 희곡이어서 연극은 그대로 배우 장민호의 이야기로 읽힌다.

망령들이 눈에 보이면서 끊임없이 죽음의 유혹을 느끼던 황포 선생은 문득 주위에 천사같은 착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교수로 불리는 이웃의 퇴직 변호사, 딸처럼 드나드는 송 순경과 연극 배우 낙희, 아내는 말하지 못하고 남편은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 부부의 모습이 결국 황포 선생의 마음을 바꿔 놓는다.

황포 선생은 '인생이 뭔지 알면 내가 하나님이게?'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욕심 부리지 않고 엄살떨지 않고 매일 매일 밥 먹고 술 마시며 열심히 사람 만나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며 노년기의 방황을 마무리한다.

한 길로만 걸어온 인생은 아름답다. 80년 인생에 50년 넘게 한 가지만 하면서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면 인생에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장민호의 분신인 황포 선생은 깊은 회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러고 보면 노년기란 얼마나 힘센 장수인가.

무대 위에서 78세의 배우 장민호 선생은 진짜였다. 배우로 연기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78년 인생을 고스란히 그 몸짓에, 표정에, 말에 담고 있어서 내가 앉아 있는 객석이 아닌 무대 위가 진짜였다.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장민호 선생은 자신의 연극 인생을 총정리하는 작품이어서 '목숨 걸고' 한다고 말했다. 80을 눈 앞에 둔 나이에 '목숨 걸고' 할 일이 있는 노배우. 정말 멋있다.

그래서 육체는 쇠약해지고, 세상은 나를 잊어가고, 주위 사람들은 연민으로 대하는 노년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관용과 애정이라고, 나는 그것이 부족했고, 늘 나만 생각해 왔다고 깨닫고 후회하는 황포 선생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노년기의 분신이었다.

호기심 많고 활기넘치는 변호사 친구(별명이 노교수)와의 우정을 들여다 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이다. 황포 선생처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치매 증세가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교수도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친구를 염려하고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노교수의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 그 역시 노년의 한 얼굴이다.

"연극계의 거목"이라는 친구의 말에 황포 선생은 "거목(巨木)이 아니라 고목(古木)"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거목은 곧 고목이 아니겠는가. 오래 되지 않은 나무가 어찌 그 가지와 잎으로 커다랗고 넓은 그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정말 세상은 살 만한지 아닌지.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꽉 채우는 노배우가 있다는 것, 그 분이 우리 앞에서 한바탕 연극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신다는 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지만, 정말 세상은 살만한 것일까? 숙제 하나 받아들고 비오는 국립극장 옆길을 걸어 내려왔다.

덧붙이는 글 |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 / 이근삼 작, 김영수 연출, 출연 장민호·윤주상 등 / 5. 16∼5. 22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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