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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란 속담이 있다. 여기서 저승이란 죽음의 세계요, 사후의 세계를 의미하리라. 그런데 저승이라 하더라도 결코 슬퍼할 것만은 아니다. 이승의 삶의 응답이요 연기에 의한 열락(悅樂)의 천당과 극락이 있으니깐…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현세적 삶의 지향과 실천이란 의식 즉 깨달음과 선행은 불확정의 단계이고 더욱이 사후의 믿음은 어설퍼서 더 더욱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어서, 더 더 더욱 이승에 집착하지 않나 여겨진다.

어떤 사람이 그 나름대로의 삶을 엮어나갈 때, 제3자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시각과 기준에 입각하여 그 사람의 삶을 '잘 산다' 또는 '못 산다' 등으로 평가한다. 인간이 두 발로 땅을 딛고 머리로 하늘을 받들고 있듯, 인간 존재의 삶을 사실의 차원 뿐만 아니라 가치적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

'단순히 살고 있다'가 아니라 '잘 산다' 또는 '못 산다'란 판단적인 진술은 관찰자 또는 발화자의 가치의식을 전제로 하여 진술이 가능하고 이는 또한 진술자의 가치의식이 전제된 것이다. 삶을 영위하는 주체이든 그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객체이든 인간은 누구나 잘 살고 싶은 본능을 지닌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러한 본능적 욕망은 인간의 본질적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가치적 존재라 하겠다.

어떤 아이가 동무 집에 놀러갔다가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기다려 노심초사하던 그의 엄마가 아이의 돌아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혹시 나쁜 아이와 사귀지나 않는 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 녀석의 집은 어떠하냐?"
그 꼬마 녀석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랑스레 답했다.

"동무네 집은 66평 빌라이고요, 아빠는 대학의 교수님이어요. 그리고 그 집 차는 그랜져 3.0입니다. 분명 잘 사는 집입니다."

아이의 대답을 들은 그의 엄마는 철부지 어린 아이가 삶을 외적이고도 물질적인 잣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의 이와 같은 인식과 발화는 자신의 가정 또는 학교 등의 또래집단 또는 TV 등의 매스 미디어에 의해 감염된 것이라 생각하며 슬퍼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란 가사의 노래가 저녁답에 전봇대에 걸린 유선 라디오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우리를 설레게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60년대 제3공화국 때에 국가가 후원한 관제가요로 '잘 살아보세' 란 노래다.

당시는 궁핍과 남루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어서 경제개발계획이 실행되던 때이라 그 노래를 들으며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배고픔과 추위를 달래기도 했다. 이 노래가 유행했던 당대의 사람에게 '잘 산다'라는 것은 허기와 남루가 극복된 삶으로 인식되었다.

인간의 존재 방식이 그러하듯 인간이 의식하는 가치의 문제 역시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이다. 그런데 이들의 양상은 때로는 일치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충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객관화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를 관념계의 이데아(Idea)라 지칭하고 그것의 구체적인 양상이 현실계에 현현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현실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가치를 경험한다 할 것이다.

보다 구체화된 개개인의 일상적 삶에서 '잘 산다'란 어떤 삶을 지시하며 그 삶의 내포적인 함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삶이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삶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와 가치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삶의 총체적이고도 보편적인 이해를 위하여 지식을 쌓아 지혜로움을, 성찰을 통하여 깨달음을 이루려 노력하지만 항상 그 구도의 도정에 놓여 있기만 하였다.

여정은 시작되었지만 길은 끝나지 않는 구도의 길이었다. 깨달음을 통한 지혜로움의 길은 길은 거칠고 험하여 지친 다리를 끌며 혼돈과 미망 속을 헤메기 일쑤일 때, 배움의 손길을 내어밀면 공자님은 '인(仁)', 부처님은 '자비(慈悲)', 예수님은 '박애(博愛)'라 답 주시며 그분들 모두는 우리에게 '더불어 사랑하라'라 가르치신다.

그분들이 깨달음을 위해 걸으신 길이 오솔길이었든 가시밭길이었든 우리에게 '더불어 사랑하라'라 가르치신다. 그 사랑만이 우리 인간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라 본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란 화두에 대한 해답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잘 산다란 것이 어떤 삶일까?'란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 본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물질중심주의적 가치관에 전염된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반추하며 '잘 산다'란 언어 표현의 내포적 함의를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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