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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의 기존 해석
'실사구시'라는 말은 지금까지 크게 두 가지의 용법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는 실학(實學) 전체를 특징짓는 표어로서의 실사구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단계로 구분되는 실학의 제 학파 중에서 경서, 고전, 금석문에 대한 고증에 힘썼던 완당 김정희(金正喜)로 대표되는 학파의 연구 방법론을 가리키는 용어가 그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나 실사구시는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으로 이해되곤 했습니다. 이런 풀이는 별 무리가 없는 무난한 해석으로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해석은 이미 우리 의식 속에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은 것도 사실이지요.
그 당연시된 실사구시의 뜻풀이를 처음부터 재검토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과연 실사구시는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이었을까요?
물론 국어사전들은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실사구시에 대한 세 가지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정리한 것입니다.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문헌학적인 고증의 정확을 존중하는 과학적·객관주의적 학문 태도를 이르는 말임." (두산동아 국어사전)
"사실에 근거하여 이치를 탐구하는 일, 또는 그런 학문 태도." (연세대 한국어 사전)
"실제로 있는 일에서 진리를 구함. 곧, 공리나 공론을 떠나서 정확한 고증에 따라 과학적으로 밝히려던 청나라 고증학의 학문 태도로서, 조선 때 실학파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말 큰사전)
실사구시의 '실사(實事)'는 앞에 든 모든 국어사전에서 '사실에 토대를 두어,' '사실에 근거하여,' 혹은 '실제로 있는 일에서'라고 풀려 있습니다. 모든 국어사전이 실사(實事)와 사실(事實)을 같은 말로 풀어놓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에 토대를 두어'라든가 '-에 근거하여,' 혹은 '-에서'라는 표현은 해석자들의 상상력의 산물이지요.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뜻의 한자어라도 나라에 따라 구성 한자의 어순이 바뀐 것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혼인을 약속하는 것을 약혼(約婚)이라고 하지만 중국어에서는 혼약(婚約)으로 씁니다. 또 '구체적인 증거'라는 뜻의 물증(物證)도 중국에서는 증물(證物)이라고 씁니다. 또 중국어에서는 어언(語言)이라고 쓰지만 우리는 언어(言語)라고 씁니다. 실사(實事)와 사실(事實)을 같은 뜻으로 보는 것은 아마도 그 같은 맥락에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실사구시의 '실사'는 사실(事實)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말이 처음 나오는 문헌을 보면 명확해 집니다.
'수학호고 실사구시(修學好古 實事求是)'
'실사구시'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입니다. 거기 보면 학문을 즐겼던 한 왕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유덕(劉德)은 한(漢)나라의 경제(景帝)의 아들이었는데 하간(河間:지금의 하북성 하간현)의 왕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는 고서(古書)를 수집하여 정리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진시황의 분서 이후 찾아보기 어려운 고서적을 비싼 값을 치르고 사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유덕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기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진(秦)나라 이전의 옛책들을 그에게 바치는가 하면 어떤 학자들은 직접 하간왕의 도서 정리 및 연구작업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한 후에도 유덕은 고대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하는데, 바로 이 대목에 하간왕 유덕을 칭송하는 표현으로 "수학호고실사구시(修學好古實事求是)"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원문에는 그 구절이 띄어쓰기 없이 이어져 있지만 후대에는 흔히 '수학호고 실사구시'로 띄어읽는 경향이 있었고 청나라의 시기에 나타난 고증학파는 그중 후반부만을 떼어내어 공론(空論)만 일삼는 양명학(陽明學)을 비판하는 표어로 삼았습니다.
'수학호고 실사구시'는 사실상 '수학'과 '호고'와 '실사'와 '구시'를 나란히 늘어놓은 말입니다. 그중 '수학호고'는 '배움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이런 해석에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이견이 없는 이 해석으로부터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수학'과 '호고'가 대구로 쓰였다는 점과, '수학'과 '호고'는 인과관계로 반드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배움을 닦았으므로 옛것을 좋아했다'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냥 유덕의 행동을 차례로 열거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실사구시'에 대한 해석에서는 그런 간단한 사실이 자주 무시됩니다. 여기서도 '실사'와 '구시'가 대구를 이룬 표현이며 그 사이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사'를 함으로써 '구시'를 했다고 새겨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 점을 더 보기 전에 '실사'와 '구시'의 해석문제를 먼저 보십시다.
구시(求是)는 '정확한 개념과 사실 추구'
우선 '구시(求是)'의 시(是)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앞의 국어사전들은 '시(是)'를 '진리'나 '이치'로 해석했지만 저는 거기에 반대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시(是)'라는 한자는 진리나 이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진리'나 '이치'를 뜻하는 한자로는 도(道)라든가 리(理)라든가 혹은 법(法)이라는 말이 흔히 쓰였습니다. 한서(漢書)의 저자가 더 그럴듯한 이런 낱말들을 두고 굳이 시(是)자를 쓴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하간왕 유덕이 한 일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유덕이 한 일은 옛책을 모아서 읽고 연구한 것이었습니다. 진시황의 분서사건 이후로 많은 책이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글자나 문장의 뜻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한문은 원래 글자와 문맥에 따라서도 뜻이 다양해집니다. 그러나 심지어 같은 글자가 같은 문맥에 놓여 있더라도 대단히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확한 해석이 철학 그 자체만큼 어렵거나 복잡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 혼란 속에서 유덕은 옛 책을 수집해서 해석의 논란이 있는 내용들을 바로 잡아 나갔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의 학문 활동은 직접 진리나 이치를 탐구하는 활동이었다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문헌의 뜻을 바로잡는 일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고증학입니다. 청나라의 고증학파들이 멀리 하간왕 유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실사구시'라는 표어를 따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유덕이야말로 최초의 고증학자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증학의 일차적인 목표는 진리나 이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나 이치를 탐구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문헌을 정비하고 그 뜻을 바로 잡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이 바로 '구시(求是)'라고 봅니다. 글자나 문장의 뜻이 '이런 것이다'라고 밝히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한자로는 '시(是)'입니다. 시(是)는 '그렇다'는 뜻이고 한국말로는 '-이다'라는 서술격조사에 해당합니다. 시(是)나 '-이다'는 무언가를 정의(定義)할 때에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구시'는 '사물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를 내리는 일'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진리 탐구 이전에 그것에 필요한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물론 개념을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진리를 어떻게 탐구하느냐가 미리 결정되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그게 후대의 고증학자들이 경서와 금석문을 고증하려고 노력했던 일차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좀 더 나가서 구시(求是)는 '사실 밝히기'라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의 유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실(事實), 즉 실제의 일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놓는 것이 바로 구시입니다. 사실이란 가치판단에 따른 '옳은 일'과도 다른 개념입니다. 가치판단의 이전에 가치판단의 소재가 되는 '있는 그대로의 일'이 바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시(求是)란 '사실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뜻의 시(是)를 '진리'나 '이치'로 해석하는 것은 좀 지나친 일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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