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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실패였다. 내가 처음 간송미술관을 찾아갔을 때 나는 단 한 점의 그림도 보지 못했다. 대신 대낮에도 시끄럽게 울어대는 수탉의 홰 치는 소리가 나를 반길 뿐이었다.

암탉 여러 마리를 거느리고 소나무 가지에 앉아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던 수탉. 도심 한가운데서 만났다는 것이 이상할 법도 한데, 시간이 정지한 듯한 간송미술관에선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전시가 있거나 없거나 미술관 구경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반인이 간송미술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는 1년에 딱 2번뿐이라 했다. 한성대입구역에서부터 물어물어 20여분을 걸어간 보람도 없이 말이다.

"지금은 못 들어가요. 울 아빠가 지키거든요"

미술관을 기웃거리는 나에게 똘망똘망 댓거리를 해주던 조그만 여자 아이도 이제는 제법 자랐을 게다. 미술관 입구 작은 쪽방에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한참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미술관 문지기 아저씨가 전시회 때 오라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확실하게 쐐기를 박고서야 겨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돌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2년. 다음 전시에는 꼭 가마라던 약속을 나는 지키지 못했다. 늘 이런저런 이유, 이런저런 핑계가 있기도 했지만, 간송미술관의 기획전시가 다른 미술관 전시보다 일정이 더 짧았던 탓도 분명히 있었다.

신문에서 간송 40주기 특별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시회라면 자고로 이 정도 작품은 갖춰 놓고 사람을 불러모아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그런 전시회였다.

간송미술관은 전형필 선생이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일제 시대, 우리 문화재가 해외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값도 묻지 않고 사들인 작품들을 모아 1938년에 문을 열었다. 가지고 있는 작품은 5천점이 넘는다는데, 이번 특별전에는 산수화와 인물화를 중심으로 백여점만 전시하고 있다.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다. 다들 어찌 그리 알고 찾아왔는지. 좁은 전시장에 빼곡이 들어찬 사람들 덕분에 호젓한 마음으로 그림을 완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아쉽다. 하지만, "우리 그림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만큼이나 있구나"하는 기쁨 또한 그만큼 크다.

인물화와 산수화와 1층과 2층에 전시되어 있는데, 신윤복의 "미인도'(45.5×114cm)를 진품으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엇보다 컸다. 그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둥글고 복스럽게 생긴 얼굴에 볼에는 홍조를 띠고, 풍만한 치마가 부드럽게 몸을 감싼 이 여인의 그림에서는 살짝 비치는 버선코가 압권이다.

위로 약간 솟은 그 버선코에 마음 빼앗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묵직해 보이는 노리개를 두 손에 들고, 그림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동자 또한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커다랗게 펼쳐 놓고 보니, 작은 크기에 우겨 넣은 사진으로 보았을 때와는 그 맛이 사뭇 다르다.

신윤복의 '월하정인'을 만나는 것 또한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달밤에 몰래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의 모습을 살짝 엿보고 그린 이 그림에서는 설핏 기운 달이 두 정인의 마음을 더욱 애틋하게 여기게 만든다. '신윤복이란 이는 사랑을 아는 이였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김홍도의 그림은 또 어떠한가. 화창한 봄날,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꾀꼬리 노래에 마음을 빼앗긴 채 귀를 기울이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마상청앵'(52×117.2)을 보면 춘정을 이기기 힘들었던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란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 정선의 산수화까지 보고 나면 직접 가보지 못한 금강산이, 언제라도 가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길 나서기가 쉽지 않은 인왕산 암벽이, 유유한 북한강이 당장이라도 눈앞에 펼쳐진 듯 마음 깊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보물들을 한꺼번에 만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말이다.

열어 놓은 전시장 창문 밖으로 얼핏 내다보이는 파초의 싱그러움이 그림 보는 즐거움을 더욱 크게 하고, 불어오는 바람이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이어 준다. 화사하게 피어 있는 메발톱꽃들의 향연도 좋고, 오가는 이가 많아서 닭장에 가둬 놓은 수탉의 호기로움도 좋고, 아삭아삭 배춧잎을 갉아 먹고 있는 몇 마리 토끼들도 간송미술관에는 아주 잘 어우러지고 있다. 슬렁슬렁 미술관 경내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 표정도 한껏 여유롭고 한가롭다. 이게 간송미술관이 지닌 힘이 아닐까 싶다.

6월 2일이면 이 전시가 끝난다. 이번 전시를 놓치면 다시 반년을 기다려야 일반에게 공개하는 전시회를 겨우 만날 수 있다. 손으로 만져 볼 수는 없지만 눈으로라도 만져 볼 수 있는 좋은 전시회를 만나는 일은 그리 흔한 기회가 아니다. 그러니, 이번 주말에 별일이 없다면 반드시 주말 나들이에 성북동을 꼭 끼워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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