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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요즘 집에 조용히 앉아있으면 여기 저기서 축구 방송 소리가 들린다. "슛 골인∼" 혹은 "와∼~ 하는 함성과 "아이구∼" 하는 아쉬운 탄식으로 TV 시청을 안 해도 대충 어느 팀이 이기고 지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회사를 가기 위해 탄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읽고 있는 신문에도 월드컵에 관련된 커다란 사진들이 보이고, 가만히 눈감고 앉아 있으면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 또한 축구 이야기다. 축구 일색인 세상에서 나와 천천히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면 또 다른 세상이 나를 맞이한다.

기호와 사람 이름이 쓰여진 띠를 두른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안녕하십니까? 몇 번 누구입니다"하며 내게 아는 체를 한다.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면 다른 번호와 이름을 외치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이런 비슷한 인사를 몇 번 들은 뒤 길을 걸어가면 벽마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의 얼굴이 쭉 붙어있다.

오늘 어떤 팀이 경기를 열고 어느 팀이 이기면 승점 몇 점이어서 이렇고 저렇고 하는 복잡한 계산은 그냥 자연스럽게 되는데, 벽에 붙은 얼굴 중 누구를 뽑아야 되는지는 정말 감이 안 잡힌다. 내가 사는 고장의 지도자를 뽑는 일은 나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각성시키며 신문을 뒤져 정책을 살펴봐도 솔직히 다른 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의 평을 듣고 나야 "그렇구나"라는 수긍은 가면서도 미심쩍은 구석이 슬그머니 마음 한 쪽에 자리잡는다.

시장 후보는 그래도 신문을 뒤적거리며 나름대로 그들의 정책과 얼굴을 연결시켜 생각이라도 해보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기호도 이름도 얼굴도 모두 다 각자 논다. 내 머리가 좋지 않거나 관심이 없어서 그렇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대부분의 국민이 내 수준이라면 선거가 문제 있는 것 아닌가하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따사로운 햇살을 벗삼아 경로당 활성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러 갔다. 어르신들과 인사를 하고 방에 앉자마자 띠를 두른 사람들이 인사를 하며 우르르 들어온다. 그리고는 어르신들에게 명암을 돌리기에 바쁘다.

"어르신! 몇 번 아무개입니다. 꼭 찍어주셔야되요" 말을 마치고 악수를 하다 경로당 문을 나서며 "몇 번 이라구요?"하고 다시 묻는다. 그리고는 우르르 나가버린다. 건강체조 프로그램 전에 혈압 체크를 세 명 정도 하는데 또 다른 선거단이 온다. 이런 일이 서너 차례 반복되면 그때서야 우리의 프로그램을 진행 할 수 있는 평화가 찾아온다. 온 사람들은 정중하게 혹은 친밀감을 가장한 익살로 저마다 이름과 번호를 대며 찍어 달라고 인사를 하는데, 한 명도 어르신들에게 정책을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경로당의 중심 인물인 회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당선되면 해줄지 안해줄지 미심쩍지만 경로당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은 그래도 아주 간혹 있다. 10분도 안 된 시간에 내가 모은 명암은 3개나 되었다. 명암 뒤를 보니 각자의 양력이 빼곡하게 차 있다. 나도 기억이 안 되는 이들의 이름과 기호를 어르신들이 알 수 있을까? 기억한다 한들 얼굴 생김과 이름의 잘남과 못남을 보고 뽑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설명도 없이 휙 명암만 뿌리고 간 행동으로 누구를 뽑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옆에서 지켜보는 내게 그들의 행동이 어르신을 무시한다는 느낌까지 갖게 하는 건 왜일까?

어느 후보측은 드러내놓고 노인은 월드컵에도 관심이 없고 투표율도 아주 높아 노인만 잡으면 당선은 그냥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경로당이 때아닌 봄날을 맞이하여 여기 저기서 축구의 함성이 튀어나오듯 경로당에서는 기호와 아무개의 이름들이 서로 소란스럽게 활기를 띄고 있나보다.

회장님과 한 후보가 이야기를 하고 나온 후 선거단이 가고 없는 자리에서 "노인복지에 관심이 있다고 해요?"라고 묻자 "선거철마다 찾아오는 뜨내기들 뭔 말은 못해. 다 그놈이 그놈이지. 뽑기 전에 잘한다고 하지말고 뽑힌 후에 관심을 가져야지...다 필요없어" 하신다.

월드컵을 핑계 대며 국민들이 선거에 관심 없다 탓하지 말고, 진정 선거가 국민을 위한 것인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이 월드컵 열기에 쌓여 선거에 관심 없으니까 정책 설명 없이 얄팍한 웃음으로 노인을 잡겠다는 반짝 정책은 씁쓸하다 못해 무례하게까지 여겨진다. 경로당을 방문하기 앞서 노인의 삶의 질을 높여 풍요로운 노년을 맞이하도록 하기 위해 고민을 하고 그것에 대해 최소한도의 설명을 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가 아닐까?

후보자 본인을 위한 선거가 아닌 국민을 위한 선거가 된다면 월드컵에 열광하는 붉은 악마들이 내가 지지하는 후보자와 선거에 열광할 것이다.

선거철만 되면 그동안의 무심함이 무색할 정도의 열정과 붉은 악마단 못지 않은 노인에 대한 관심을 지켜보며 누구를 위한 선거인지 다시 한 번 물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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