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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만에 달랜 원혼굿 충북민예총의 남인숙씨가 영령들의 한을 태워 날려 보내고 있다.
52년만에 달랜 원혼굿충북민예총의 남인숙씨가 영령들의 한을 태워 날려 보내고 있다. ⓒ 양김진웅
백조일손영령 위령비
백조일손영령 위령비 ⓒ 양김진웅
'송악산 앞 바다는
어제처럼 푸릅니다
산방산 끝에 닿을
절규하던 그 울음이 오늘은
메아리 되어 뼈속까지 스밉니다

오손도손 모여 앉아
식은 밥 나눠먹던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며 끌려가던
그 날은
하늘은 온통
오늘처럼 타더이다

죄 지은자 하나 없고
죄 없는 자만 묻혀
백 서른 둘 뼈가 엉켜
한 자손이 되옵니다
이 설움 시대를 탓하며
옷 소매를 적십니다

억울한 죽음에도
꽃이 핀다 하더이다
빨간 전설로 피어
새가 운다 하더이다
석류꽃
가슴에 피어
붉게타게 하소서

진실을 빗돌에 새겨
참 역사를 세웁니다
향 피워 두 손 모아
술잔 가득 따르오니
다 잊고
이 땅을 안아
고이 편히 쉬소서'

-제주도 4·3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 세움-


역사의 증언 '부서진 위령비' 세운지 열흘만에 경찰당국에서 주민들이 한푼두푼 모아 세운 위령비를 망치로 산산히 부숴 버렸다.
역사의 증언 '부서진 위령비'세운지 열흘만에 경찰당국에서 주민들이 한푼두푼 모아 세운 위령비를 망치로 산산히 부숴 버렸다. ⓒ 양김진웅
추적추적 내렸던 비가 그친 2002년 7월 7일.
백조일손 묘역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132명의 영령을 위무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충북민예총과 제주민예총의 4년째 문화예술교류 차원에서 열린 이날 위령제는 52년만에 처음으로 제주토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참여해 치른 위령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충북민예총(지회장 도종환)이 주관한 이날 위령제는 조시(추모시) 낭독과 풍물굿패 '씨알누리'의 위령 풍물굿, 춤패 '너울'의 살풀이춤 순으로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날 참가객들은 '원혼들의 울부짓는 모습'을 형상화 한 '토우' 49개('사십구제'의 뜻을 담음)를 묘역 한켠에 묻어 50년 넘어 동안 풀지 못한 원혼의 넋을 달랬다.

부서진 비석과 위령제 눈 부릅 뜬 '비석의 증언'  너머로 원혼의 넋을 달래는 추모시를 읽고 있다.
부서진 비석과 위령제눈 부릅 뜬 '비석의 증언' 너머로 원혼의 넋을 달래는 추모시를 읽고 있다. ⓒ 양김진웅
토우를 제작한 충북민예총 김만수씨는 "마치 절규하고 울부짓는 듯한 토우의 모습은 당시 죽음을 앞 둔 원혼들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며 "이 의식은 뼈와 살이 엉켜 있던 132명의 원혼들에게 팔·다리를 다시 찾아주고, 이를 따로 따로 묻어주는 해원의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배 백조일손유족회장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가 억울한 죽임을 당한 후 아직껏 이처럼 성대한 위령행사를 치러보지 못했다"며 "100명이 넘는 참배객이 찾아 위령굿까지 한 행사는 52년 만에 처음"이라고 감개무량해 했다.

제주민예총 김상철 지회장은 "아직도 섯알오름 학살터에는 40여 가구의 유해들이 채 발견하지 못한 채 묻혀 있다"며 "차후 유해 추가발굴과 함께 이 곳 학살터에도 위령탑을 세워 다시는 억울한 죽음이 되풀이되지 않는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죽음의 절규를 형상화 한 '토우' 마흔아홉개의 토우마다 당시 희생자들의 생생한 울부짓음이 보이는 듯 하다
죽음의 절규를 형상화 한 '토우'마흔아홉개의 토우마다 당시 희생자들의 생생한 울부짓음이 보이는 듯 하다 ⓒ 양김진웅
'이제 원이 풀리려나' 충북 예술인들이 묘역 한켠에 묻을 '토우'를 정성껏 싸고 있다.
'이제 원이 풀리려나'충북 예술인들이 묘역 한켠에 묻을 '토우'를 정성껏 싸고 있다. ⓒ 양김진웅
'토우를 묻은 묘 자리' 백조 원혼들이 52년만에 팔, 다리 뼈를 다시 찾아 고이 잠들었다.
'토우를 묻은 묘 자리'백조 원혼들이 52년만에 팔, 다리 뼈를 다시 찾아 고이 잠들었다. ⓒ 양김진웅


할아버지는 100명, 자손은 하나
'예비검속'으로 죽은 희생자

▲ 대정읍에 세워진 백조일손위령비

1950년 8월 20일(음력 칠월칠석).
제주 4·3 항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즈음 제주도 남제주군 송악산 섯알오름 아래 일제가 만들었던 탄약고 터에서 소리없는 죽임이 있었다. 4·3 항쟁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무고한 사람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분으로 검거해서 무려 252명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몇년이 지난 후에 유족들이 섯알오름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 중 132명의 시신을 수습해 조그만 봉분 132개를 쌓고 모셔놓은 곳이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이다.

당시 죽임을 당한 이들 중 15살-20살이 14명, 21살-30살이 71명으로 정말 채 피어보지도 못한 '꽃 같은' 나이의 어리고 젊은 우리의 형제였다.
사건이 나자마자 무장군인들은 '민간인 접근금지구역'으로 통제하고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 후 세월은 흘러 6년 만에 유골들을 발굴하였으나 누구의 시신인지 모른 채, 누구의 뼈인지도 구별할 수 없이 뒤엉킨 팔 다리 등뼈 온갖 작은 뼈들이 한데 모아 한 사람씩 맞추었지만 누구의 머리에 누구의 팔, 다리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당시(1956·5·18)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부지 483평을 유족들이 십시일반으로 공동 매입해 유해들을 안장한 후 '백조일손지지(之地)'라고 이름하고 이듬해 6월 무덤 앞에 약 2m의 비석에 총살된 원혼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어넣어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5·16 쿠데타가 나고 4·19때 도주했던 경찰들이 다시 복직되면서 열흘도 채 안된 6월 15일 오전 모슬포지서(지금의 파출소) 급사에게 술을 먹인 후 망치(해머)를 주고는 비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백조일손(百祖一孫)'이란 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날 한시에 죽어 누구의 시신인지도 모르는 채 같이 무덤도 같고, 제사도 같이 치르니...' '조상이 다른 백여 할아버지가 한날 한시에 죽어 뼈가 엉키었으니 그 자손은 하나다'라는 기막히고 기구한 이름의 다름 아니다. / 양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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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대자(大者)는 그의 어린마음을 잃지않는 者이다' 프리랜서를 꿈꾸며 12년 동안 걸었던 언론노동자의 길. 앞으로도 변치않을 꿈, 자유로운 영혼...불혹 즈음 제2인생을 위한 방점을 찍고 제주땅에서 느릿~느릿~~. 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 아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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