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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에 항거하던 시절, 80년대 보안사의 강압과 가혹행위 속에 수백명이 강제징집됐고 그들을 대상으로 '녹화사업'이 진행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6건의 의문사가 발생했다.
현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파악하고 있는 강제징집 피해자 규모는 군 당국의 공식 통계로만 447명(81.11∼83.11). 그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문사위원회는 오는 17일부터 22일까지 5차례에 걸쳐 집단간담회를 열어 녹화사업(82.9∼84.11) 대상자 256명 중 200여명의 증언을 청취할 계획이다.
<오마이뉴스>와 의문사위원회는 군사정권이 이들 강제징집/녹화사업 피해자들에게 가한 가혹한 인권유린의 실체를 명확하게 밝히는 작업의 일환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한다. - 편집자 주
1983년 5월 4일 새벽, 이윤성은 205보안대에서 죽었다. 잠자던 내무반을 빠져 나와 테니스장 심판대에 목을 맸다. 그의 죽음 이후 군 수사 당국은 북한의 삐라를 소지한 것이 발각되어 월북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그가 죽은 5월 4일 전역일인 5월 12일을 8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1주일하고도 하루만 지나면 군 생활을 마감하고 대학으로 돌아가 운동권 동료들과 만날 수 있었다. 아니, 2대 독자로 애지중지 키운 부모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죽었다. 그것도 다른 사병들처럼 자신의 근무지에서 총을 쏘아 죽은 게 아니라 목을 매서 죽었다. 보안대 사병들은 그런 그를 보고 '독하다'고 했다.
1982년 11월 3일 그는 학생의 날 연합집회에 참석했다가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때는 신군부에 의해 위축되었던 학생운동이 그간의 축적된 역량으로 가두시위를 감행하던 때였다. 그리고,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씨가 광주교도소에서 사망한 사건을 두고 항의투쟁이 전개되던 때였다. 성균관대학교 1학년 때부터 운동권 학생으로 써클과 학회 활동에 열심이었던 그가 이런 중요한 시위에 참여한 것은 당연했다.
연행 3일 뒤 그는 당시 101보충대를 거쳐 5사단 신병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2대 독자로 애초 입영 대상자도 아니었지만, 그 시절의 강제징집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구보를 못하는 평발도, 녹내장을 앓고 있는 시력 장애자도, 안경을 벗으면 다시 안경을 찾지 못하는 약시도 모두 입대 조치되었다. 징병 검사를 대신해 보충대에서 키나 재고, 몸무게나 쟀다. 그리고, 징병검사의 나머지 항목은 모두 '정상'으로 기록되었고, 병적기록부에는 '특수지원'이라는 스탬프가 선명하게 찍혔다.
이윤성은 6개월의 군 생활 동안 활기차게 생활했다. 소대 대항 축구를 할 때는 검은 안경을 고무줄로 묶고 작은 몸집이지만 파이팅 넘치게 몸싸움도 하고, 헤딩도 했다. 소대에서 족구대회가 열리면 앞장서서 18번인 '옹헤야'를 부르며 소대의 사기를 올리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소대원들은 한결같이 이윤성이 소대생활을 활기차게 잘 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그런 그를 보안대는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그는 훈련을 마치고도 다른 동기들보다 늦게 자대 배치를 받았다. 그리고 보안대 조사를 받고 학교에 나왔던 것으로 위원회 조사 결과 확인되고 있다. 결국 그는 그해 4월 이전 이미 두 번이나 보안대에 불려갔고, 마지막으로 전역을 코앞에 두고, 205 보안대로 끌려간 것이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205보안대 대공수사관은 이윤성이 불온삐라 2장과 철학개론과 같은 사회과학 서적이 발각되어 월북기도 혐의를 받고 조사받는 것을 자책하여 죽었다는 군 당국의 수사 결과를 뒤집었다.
이윤성은 학생운동 전력을 극구 부인하다가 이것이 밝혀질까 두려워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더블백에서도, 그의 관물대에서도 불온삐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면 그는 정말 자신이 학생운동 경력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자살한 것일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이미 2학년 때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을 해내고 있었고, 이 써클은 공개적인 써클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학생운동 경력은 이미 노출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면, 그는 왜 죽음을 결심했을까? 활달하게 모나지 않게 생활했던 그가 그만한 일로 쉽게 좌절한다는 것은 어째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시 그는 누군가에 의해 타살되어 자살로 위장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지금까지 위원회 조사 결과를 보면 타살의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보안대 사병들조차 한입으로 사체 발견 상황을 진술하고 있다.
그래서 이윤성의 의문사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 조사 과정에서 그의 의문사를 풀 수도 있을지 모르는 중요한 진술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이윤성이 205보안대에서 심사(녹화사업)을 받을 그 즈음에 다른 특수학적변동자(강제징집자)가 심사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대 출신일 것이라고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를 이윤성이 만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4월 하순경에 205보안대에서 이윤성과 함께 녹화사업을 받고 있던 그 사람이 있었다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당시 5사단 강제징집자의 녹화사업을 맡았던 205보안대는 막 녹화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녹화사업을 받았던 전남대 78학번의 강제징집자도 또한, 사건을 푸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윤성 사건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전혀 모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원회에 와서 조사에 응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 확보한 명단들로는 찾아내지 못했다. 군 당국이 제공한 강제징집자 명단에는 누락자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면, 누군가 205보안대에서 이윤성 직전에 또는 동시에 녹화사업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나타나 증언한다면 이윤성 사건의 경위를 많이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나타날 것으로 믿으며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해 6월 18일 22사단에서 매복 근무 중 총으로 자살했다는 고려대생 김두황이 죽음 직전에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진술을 한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222보안대에서는 이런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김두황이 보안대 또는 보안사령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증언해줄 강제징집자도 역시 우리는 찾고 있다. 또한, 같은 해 8월 14일 15사단에서 철책 근무 중 사망한 최온순이 죽음 직전에 일주일 동안 보안대에서 가서 심사를 받은 사실을 아는 강제징집자도 찾는다.
해당 기관의 비협조와 담당자들의 거짓진술을 넘을 수 있는 길은 희미하고 작지만, 이런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전체 그림을 그려내는 일이다. 그런 일에 그들이 나서줄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덧붙이는 글 | * 연락처: 전화 3703-5980∼4.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 홍기원 조사관
* 강제징집·녹화사업 피해자 집담회가 계속 진행됩니다.
18일 오전 10시 22사단 관련자/19일 오전 10시 7사단 관련자/20일 오전 10시 15사단 관련자/22일 오전 10시 무림, 학림 사건 관련자 및 군 사건 관련 구속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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