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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증손 이항증(광복회원)·이범증(중앙중학교 교장)·고손 이창수(한미은행원)씨는 2002년 8월 15일 광복 57주년을 맞이하여 4백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임청각(臨淸閣)과 그에 따르는 임야 1만2000여 평을 국가에 헌납코자 2002년 8월 1일에 청원서를 청와대·국가보훈처·광복회 등에 제출하였다.

이 임청각은 경북 안동시 법흥동 20번지에 소재한 바, 석주 이상룡 선생의 17대조 이명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1519년(조선 중종 14년)에 창건된 99칸의 전통 한옥으로 그 역사가 오래될 뿐 아니라, 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조선 시대의 한옥을 대표하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창건 이후 400년 동안 고성 이씨 종가로 선비 집안의 대를 이어왔다.

일찍이 석주 선생은 퇴계학 적통을 이은 서산 김흥락(金興洛)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히던 중, 1876년에는 강화도조약에 따른 개항에 충격을 받아서 척사 위정(斥邪衛正) 활동을 하다가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책을 덮고 구국 의병활동에 나섰다.

석주 선생 생가인 안동의 임청각 99칸이나 되는 고색창연한 한옥으로 보물 182호 지정돼 있다
석주 선생 생가인 안동의 임청각99칸이나 되는 고색창연한 한옥으로 보물 182호 지정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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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땅에 조국해방 씨앗 뿌린 선각자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나라가 마침내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석주 선생은 군자금을 마련하여 가야산으로 들어가 의병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구식 무기로 일제의 신식 무기를 도저히 당할 수 없었다. 신돌석· 김상태 등 의병장이 일본군에 참패하자 석주 선생은 "궁벽한 향촌에 앉아서 승패를 점친 것이 모두 어긋났으니, 이는 시세에 어둡기 때문이다" 하고서 분연히 떨치고 나와서 동서양의 새로 나온 책을 구하여 열심히 읽었다.

대표적 친일파 송병준 후손
소유권 이전등기 소송서 '패소'

서울지법 의정부지원 민사합의1부(재판장 金潤基 부장판사)는 9일 일제시대 친일파 송병준(사진)의 증손자 송모(57)씨 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석곶리 일대 토지 2필지 19만5천여㎡의 소유자 명의를 자신들로 변경해달라며 낸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측은 송병준이 국가에 토지대금을 내고 땅을 정당하게 취득했다고 하지만 소유였음을 밝혀줄 영수증과 등기를 마쳤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송씨 등은 증조부인 송병준이 지난 1916년 7월초 국유미간지 이용법에 따라 부지를 개간한 뒤 대금을 국가에 납부하고 정당하게 취득한 재산인데도 해방이후 국유지로 편입했다며 지난 99년 10월 소송을 냈다. / 연합뉴스
신학문으로 서양의 민주제도에 눈을 뜨게 되자, 먼저 당신의 노비 문서부터 모두 불살라 버리고 그 동안 거느리던 종들도 모두 해방시키고 고향 안동에다 유인식, 김동삼과 더불어 협동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민족 자강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8월, 마침내 합방 국치를 당해 망국의 통한으로 아픈 세월을 보내던 중, 그 해 11월 비밀 광복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이동녕(李東寧)·양기탁(梁起鐸) 등이 밀사를 보내왔다. 이들 밀사는 신민회가 우리 조상들의 옛 터인 서간도에 조국 광복운동 국외 기지를 추진한 바, 석주 선생의 참여를 타진해 왔다.

이에 석주 선생은 선뜻 찬동하여 뜻을 굳히고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였다. 은밀히 가까운 일족과 동지에게 동행을 권유하자 50여 가구가 따라 나섰다. 이들을 데리고 만주에 망명 이후, 경학사(耕學社)를 창설하여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부설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을 설립하고 서로군정서 독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며 서거 때까지 일관되게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주에서 일생을 마쳤다.

아들 준형, 손자 병화 직계 3대는 애국장, 독립장으로 추서 되었고, 아우와 조카까지 합하면 임청각은 현대사에서만 모두 9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요람지라 하겠다.

하지만 해방 후 그 후손들이 이승만 정권, 군사 정권 아래서는 애국자의 후손으로 대접받기는커녕 오히려 핍박을 받아 입에 풀칠하기 위해 석유통을 메고 다니거나, 학교를 다니기 위해 심지어 고아원에 갔다는 얘기는 해방의 의미를 다시 생각케 한다. 그렇게 어렵게 살아왔지만 조상에 누가 될까봐 단 한 평의 토지를 팔아 학비나 생계에 쓰지 않고 임청각을 이제까지 고스란히 보존해 왔다.

2002년 광복 57돌을 맞이하여 그 후손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몰락한 종가(기와집 140평 대지 1600평 임야 12,000평)를 더 이상 관리할 능력도 없을 뿐더러,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로나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그 보존 가치가 매우 크기에 다음 세대에 애국 애족의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임청각 전부를 소유하여 관리해 주도록 후손들은 일체의 권리를 포기하고 국가 헌납을 청원하였다.

몇 해 전,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은 제 할아비가 나라를 판 대가로 일제로부터 받은 토지와 은사금으로 산 토지를 재판으로 찾아가서 많은 뜻 있는 백성을 분노케 한 적이 있는데, 이에 견주어 석주 이상룡 후손들은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그 건물의 역사적 문화재적 의의를 감안하여 흔쾌히 아무런 조건도 없이 국가에 헌납한 일은 독립운동가 후손답게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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