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바보'의 주력 무기는 물론 인터넷 사이트 '물총닷컴'. 이 사이트에는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이밖에도 구독중지 신청, 독립군 가입, 전투일지, 게시판 등의 코너가 마련돼 있다.
방문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전투일지' 코너. 여기에는 독립군들의 전투상황이 매일매일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전투일지는 앞의 글에서 언급한 김인철 씨가 어떻게 조선일보 구독중지를 하게 됐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문정리 사는 김인철씨 아시죠? 이 분이 조선일보 구독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분께 구독중지를 권유하니까 '생각해 보겠다'고 하시는데, 독립군 중 그분을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지원사격을 부탁드립니다."(10월 18일, 독립군 '박달')
"제가 김 선생님을 직접 찾아 뵙겠습니다. 넉넉잡고 3일만 시간을 주세요. 우하하 나는야 간다. 조선일보 끊으러."(10월 18일, 독립군 'OK')
"명중입니다. 김인철씨를 오늘 오후 1시경 만났습니다. 2∼3일 내로 조선일보를 끊겠다고 약속하셨어요."(10월 19일, 독립군 'OK')
단순하고 명쾌한 물총닷컴 게릴라전 현장중계
독립군 전투일지의 특징은 모든 것을 '실명'으로 거론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사례만 살펴보자.
"옥천환경사랑모임 홍종선 회장님이 자신이 근무하는 충일개발에 들어오던 조선일보를 일찌감치 끊었다는군요. 왜 공식적으로 접수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까, '에이, 그게 뭐 잘한 거라고 알립니까?' 하면서 씩 웃더라구요. 그리고 주변의 몇 사람에게 조선일보 구독중지를 권유했는데, 확인을 해서 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충일개발 중지된 것부터 접수해 주세요."(10월 21일, 독립군 '전변')
"조선일보를 끊기 위해 1년 이상을 지루하게 싸우고 있는 현장을 확인했습니다. 현대아파트 102동 1407호에 사시는 강경구 씨 댁인데요. 강 씨는 '조선바보'의 활약상에 대해서 알고 있다며 '우리 집 골칫거리인 조선일보를 끊게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투입중지 공문발송을 바랍니다."(10월 24일, 독립군 '안터오')
이런 구체적인 활동 덕분에 옥천에선 조선일보 구독중지가 잇따르고 있다. '조선바보' 출범(2000년 8월 15일) 한 달만에 23부가 끊겼으며, (2000년) 11월 4일 현재 '조선바보' 본부에 정식으로 접수된 것은 50여 건에 이른다. 비공식적인 사례까지 합치면 1백여 건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개인이나 업소뿐 아니라 옥천군의회, 옥천경찰서, 신용금고, 파출소, 학교 등 공공기관까지 구독중지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은 조선일보 40년 독자가 한꺼번에 네 부를 끊어버리는 '월척'을 건지기까지 했다.
독립군 가입도 이어지고 있는데, 현재 그 숫자는 200명을 넘어섰다. 인구 6만명의 옥천에서 이런 정도의 회원수라면 가장 비대한(?) 조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독립군들이 '조선바보'에 가입한 직후 실천하는 것은 물론 조선일보 구독중지. 다시 전투일지를 살펴보자.
"김원회 씨가 독립군에 가입하셨습니다. 우선 아버님께서 보시는 조선일보부터 끊도록 했다는군요. 앞으로도 눈에 띄는 대로 조선일보를 뽑아내겠다는 각오를 밝히셨는데, 김원회 씨의 의협심으로 볼 때 기대해도 좋을 듯 합니다."(10월 30일, 독립군 '박달')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지역 명사나 단체가 독립군에 가입하는 낭보가 잇따르고 있다. 옥천환경사람모임 회원 24명 전원 가입, 신동인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옥천지부장 가입, 옥천군의회 의원 9명 전원 가입, 옥천군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장 가입, 민족중흥회 옥천지회장, 옥천재향군인회장 가입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쓰레기 불법투기' '옥천의 최남선' 아시나요?
한 중학교에서는 운영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독립군의 제안으로 조선일보 구독중지 문제가 정식 안건으로 상정될 예정이기도 하다. 이렇듯 독립군들의 활동공간은 제한이 없다. 목욕탕은 물론이고 초상집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지난 9월 25일 전투일지에 독립군 '안터오'가 올린 '전투보고서'를 읽어보자.
"어젯밤 초상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친구 어머니(상주(喪主)는 동이면 남곡리 이동복 씨)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내가 상가에 도착한 시간은 8시경. 그곳에서 오랜만에 P씨(공직에 몸담고 있는 관계로 익명을 요구함)를 만났습니다. 이날 P씨와의 대화는 호탕한 그의 인품과 조선일보라는 소재 덕분에 그야말로 흥미진진했습니다. 대략 한시간 가까이 회포를 푼 이날 대화는 P씨가 주로 묻고 부족한 내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어졌습니다. 결론은 간단하게 정리됐지요.
'조선일보가 그런 신문인줄 몰랐다' '정말이지 충격적이다' '조선일보 없는 옥천을 가꾸자'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이날 P씨는 독립군 가입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라도 이웃이나 친지들이 조선일보를 구독하는지 여부를 파악해 끊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이날 헤어지면서 P씨가 던진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2, 3일 내로 최소한 한 부는 끊고 독립군 본부로 전과 보고를 할께요.' 그의 독립군 가입 소식을 듣게될 날도 멀지 않았군요."
'조선바보'는 조선일보 구독중지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신문구독약관'을 알기 쉽게 문답식으로 꾸민 글을 전투일지에 올려놓은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실제로 보통 사람들에게 신문 끊기란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다. 구독중지를 통보해도 신문은 계속 투입된다. 독립군들은 그것을 '쓰레기 불법투기'로 규정한다. 독립군들은 조선일보 구독중지자의 요청을 받으면 읍사무소 청소행정계에 '쓰레기 불법투기' 행위로 신고한다.
옥천에서 독립군의 활동은 이제 술자리에서도 단연 최고의 화제거리가 됐다. 여기에는 <옥천신문>에 지속적으로 실리는 의견광고의 힘이 컸다. 이 광고에는 매주 적나라한 조선일보 친일기사 사례가 소개된다. 독립군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환상적인 연대'를 통해 전투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시민단체가 없는 척박한 이 지역에서 <옥천신문>은 창간 이후 11년 동안 지역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함으로써 지역 주민의 신뢰를 쌓아왔다. 실제로 옥천에선 <옥천신문>이 조선일보에 비해 독자수도 세 배 이상 많을 뿐만 아니라 열독률도 더 높다.
'조선바보'는 이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길 희망하고 있다.(실제로 <진주신문>이 물총닷컴을 소개하는 등 확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총닷컴을 통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조선일보 이렇게 끊었다' 수기 공모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다. 응모자 중 30명을 뽑아 상품을 지급할 계획인데, 상품도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증하고 있다. 향토화가인 정천영 화백이 그림 한 점을, 시인이자 서예가인 김성장 교사가 글씨 한 점을 내놓은 상태다.
「조선일보로부터의 옥천독립선언서」를 기초해 '옥천의 최남선'으로 불리기도 하는 김성장 교사의 삶은 독립군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옥천 청산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지난 1997년 전교조가 결의했던 보충수업 폐지를 자신이 맡고 있던 학급에서 실천하다 옥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단양으로 강제 전출되는 징계를 받았다. 자신의 신념을 굽힐 수 없었던 그는 청주에 있는 도교육청 청사 앞에 텐트를 치고 아내, 어린 자녀와 함께 3박4일 동안 항의농성을 벌였다.
바로 그때였다. 마을 주민들이 김 교사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돌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보수적인 고장에서 주민들이 전교조 교사를 옹호한다는 것은 당시 분위기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대전과 청주 등 인근 도시에서 거주하며 출퇴근하는 다른 대다수 교사들과 달리 그는 학교 바로 앞 동네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과후에 주민들을 위한 서예교실도 열었다. 주민들은 자신들과 동고동락해온 김 교사를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바보'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독립군들의 치열한 저항정신과 주민과의 연대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모닥불 토론회'는 자정 무렵에야 끝났다. 중천에 떠 있던 반달은 어느새 서산으로 기울었고,작은 별들은 총총히 은하수를 건너고 있었다. 모닥불은 어둠 속에서 더욱 활활 타올랐다.
북한이 유독 조선일보를 미워하는 진짜 이유
지난 11월 5일. 조선일보 지국을 찾았으나 문이 굳게 닫힌 채 먼지가 잔뜩 낀 조선일보 사기(社旗)만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기자는 평범했던 주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독립군에 참가하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주민대표 33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과 가장 어린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동이면에 거주하는 '할아버지 독립군' 이종학옹(79)은 일제 당시 고등교육을 받고 대전에서 토목 기술자로 일했던 전력이 있다. 그런 관계로 그는 역사의 흐름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말기 대전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동맹통신 기자 두 분과 같이 옥천에서 통근을 했습니다. 그들이 일반인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 해줬습니다. 그 양반들에게 해방이 되기 전인 45년 8월 9일에 벌써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소련이 곧 참전할 것이라는 말도 그때 들었지요. 그들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몸조심하라는 말도 했습니다. 해방을 맞기 위해 직장 동료 몇 명과 몰래 태극기를 준비했습니다. 물론 모든 일을 직장 내의 친일파들이 모르게 했지요. 그로부터 55년이 흐른 뒤에 내가 독립군에 가입하게 된 것은, 그래서 어찌 보면 매우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옹에게는 또 하나의 운명적 사연이 있다.
몇 년 전 비가 많이 오던 날 개간을 하느라 파헤쳤던 이옹의 집 앞 언덕에서 사람 뼈가 발굴됐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대량학살된 보도연맹 관련자들의 유골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젊은 시절 그도 피난을 가다 여기서 죽을 뻔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군청과 면사무소에 신고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은 채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당시만 해도 사상과 관련된 것이라면 죽은 사람의 뼈조차 건드리지 않으려는 피해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옥천신문>이 앞장서서 이 사실을 보도한 뒤에야 겨우 여론이 형성됐고, 군청이 나서 정식으로 이장을 해주었다. 이 모든 게 이 옹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체제 문제를 떠나서 해방 직후 이북이 옳은 일을 한 것이 있습니다. 친일파를 숙청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조선일보가 북한을 헐뜯는 이유와 북한이 유독 조선일보를 미워하는 이유를 압니다. 그것을 이념의 문제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민족의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조선일보가 민족에 반하는 짓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그 당시를 살았기 때문에 다 지켜봤습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한국 사람이라면 조선일보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나도 일제시대에 일본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까지 얻었으니 친일을 했다면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극적 친일'과 '적극적 친일'은 분명히 구분돼야 합니다. 조선일보는 '적극적 친일'을 했습니다. 일본이 다스릴 때는 일본을 지지하고, 미국이 다스릴 때는 미국을 지지한 것이 조선일보입니다. 만약 이 나라를 북한이 다스렸다면 조선일보는 북한을 지지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 옹은 "너무 나이를 많이 먹어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한다"면서 "젊은 사람들이 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에는 '소년 독립군' 오정현 군(17)을 만났다. 옥천고 1학년에 재학중인 그는 독립군 오한흥 국장의 장남이다. 그는 올 여름방학을 이용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 주관하는 언론학교에서 강의를 들었다. 옥천과 서울을 오가며 그는 민언련 창고에 쌓여있던 <조선일보를 해부한다>를 5∼10권씩 날랐다. 그의 '보급투쟁'으로 좀더 많은 옥천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조선일보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어요. 아직은 막연한 수준이긴 하지만 대다수가 조선일보에 대해 좋지 않은 신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요. <옥천신문>과 '물총닷컴'에서 많은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최고 관심사인 두발 자유화를 조선일보가 '교사들의 영이 안 선다'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런 문제의식이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소년 독립군'과의 일문일답이다.
―'소년 독립군'으로서 어떤 활동을 하나요.
"학교나 학원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물총닷컴'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고 권합니다."
―독립군에 가입한 뒤 변한 것이 있다면.
"신문 사설 하나를 읽을 때도 비판적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일보는 태어날 때부터 잘못 태어난 신문이 아닌가요? 조선일보는 친일단체인 '다이쇼실업친목회'가 창간한 신문입니다. 언론학교 다니느라 기차 타고 다니면서 봤던 <조선일보를 해부한다>에서 읽었습니다."
오군의 장래 희망은 기자이다. 그가 기자가 되어 있을 때는 이 세상도 많이 변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군 운동, 민들레 홀씨처럼 전국으로 확산돼야
지난 (2000년) 11월 10일. 기자는 옥천을 다시 찾았다. '조선바보' 측로부터 마침내 독립군 본부를 방문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난번 취재 때는 기자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본부의 위치만은 절대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바보' 대표의 신변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정표 대표는 요즘 "죽여버리겠다"거나 "가만두지 않겠다"는 욕설과 협박 등 전화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닷새만에 찾은 옥천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옥천군의원 전원이 독립군에 가입했다는 사실이 <미디어오늘>에 보도된 후, 유태종 조선일보 충북지역 주재기자가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조선일보가 섭섭하게 한 것이 있느냐"면서 은근히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오한흥 편집국장은 "<옥천신문>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취재해 보도할 예정"이라면서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실제로 조선일보 사회부 정웅기 차장까지 지난 11월 14일 옥천군의회를 방문해 의원들을 설득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의원들은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조선일보가 친일행각을 사죄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오 국장의 안내를 받아 독립군 본부로 향했다. 본부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전정표 대표의 자택은 옥천군 ○○면 ○○리 금강 상류의 강가에 있었다. 노총각의 '독립군 사령관'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이 외딴집이 독립군들의 '아지트'인 셈이다. 방안에는 고성능 컴퓨터와 녹음 기능을 갖춘 전화기가 각각 한 대씩 설치돼 있었다. 전화번호 ×××-7184의 뒷번호는 '친일파사'(親日派死, 친일파 사망)를 의미한다.
전정표 대표는 옥천 지역에선 보기 드물게 1992년부터 PC통신에서 논객으로 활약한 베테랑 네티즌이다.(그는 '추수'라는 ID를 주로 쓴다.) 어쩌면 그가 있었기에 '조선바보'의 물총닷컴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지난 5월 오한흥 국장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지역신문을 운영하며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오 국장과 전 대표는 곧바로 의기투합을 했다.
'조선바보'는 약 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8월 15일 정지용 시비 앞에서 출범식을 가졌다. 장소를 이곳으로 선택한 것은 정지용이 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참고로 옥천은 의병장 조헌과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다.)
출범식이 있던 날 밤 전 대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 자체가 불의가 승리하고 정의가 패배한 과정이지 않았던가. 그는 조선일보야말로 대한민국 사회악의 진원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선 몰라도 적어도 온라인에선 정의가 이길 수도 있다는 확신까지 포기할 순 없었다.
"실제로 대들어서 싸워보니 조선일보는 종이로 만든 미사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일보와의 싸움은 '미사일'과 '물총'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종이로 만든 미사일에 가장 강한 것은 역시 물총이기도 합니다. '물먹은 신문지'를 연상해 보십시오. 더욱이 옥천에는 금강이 흐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실탄은 무진장합니다."
'물총닷컴'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전정표 대표는 조선일보 반대운동은 많이 배우거나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도리어 '평범한 사람들'이 앞장서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는 최전방에서 소총을 쏘며 싸우는 보병이고, 지식인 운동은 후방에서 대포를 쏘는 포병입니다. 양자가 조화를 이루고 서로 부족한 것을 보완한다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옥천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옥천에서 조선일보 지국이 추방되는 날, 조선일보의 운명도 끝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성공모델이 민들레 홀씨가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갈 것이므로."
| | 조선일보가 옥천에 기자를 특파한 까닭 | | | 김동호씨 환영행사에 진보·보수 망라 총집결 | | | | <이 기사는 <미디어오늘> 2000년 11월 22일자에 보도됐던 내용이다---편집자>
옥천군의회 의원 9명 전원이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조선바보)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일보에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기자들을 내려보내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옥천군의회에 따르면 지난 14일 조선일보 편집국 사회부 정웅기 차장과 청주주재 유태종 기자가 옥천군의회 의장단를 방문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군의회 유제구 의장과 민종규 부의장과 개별 접촉을 갖고 군의회 의원들이 '조선바보' 모임에 집단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와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물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한 군의회 의원 전원이 특정 언론에 반기를 든 것이 특이한 현상이어서 내려가게 됐다"며 "설득하러 간 것은 아니고 참가 경위나 앞으로 활동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갔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조선일보의 부끄러운 친일 역사도 있지만 정간 4회 7백여 차례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항일 역사도 있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관련 서적을 전달하고 조선일보에 대한 공정한 시각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19일 도보로 전국일주를 하면서 안티조선 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동호 씨가 옥천군에 도착하자, 옥천군의 보수·진보 인사를 망라한 환영단이 마중을 나가 관심을 끌었다. 민종규 군의회 부의장, 민족중흥동지회 회장,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회장, 전교조 옥천지회장, 민주당 충북도지부 사무부처장 등 지역인사들이 대거 환영행사에 참석했다. / 정지환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