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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보다 했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당시의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은 그런가 보다 했다. 경선불복과 신당창당, 병역면제 의혹 등으로 점철됐던 15대 대통령 선거의 혼돈스러움은 이들에게는 깊게 각인되지 못한 채 그렇게 김대중 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병역비리의혹 사건을 바라보는 군 장병들의 시각/김정훈 기자

▲ 막 차에 오른 한 장병이 배웅나온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정훈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국민의 정부를 내세운 김대중씨는 아들들의 부정부패로 무너져내렸고 민주당의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였던 이인제씨는 국민경선에서 노무현씨에게 패배했다. 그 사이 현정부의 실정으로 이반된 민심을 독식한 이회창씨만이 다섯 달 앞으로 다가온 16대 대통령 선거의 결승점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 있다. 그러나 그런 이회창씨에게도 5년간 잠복돼 있던 장애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들의 병역비리의혹이다.

똑같은 물리적 시간을 보낸 97년 당시의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은 어느 덧 푸른 전투복의 군인으로 변신하여 산골오지의 수색대로, 화기부대로, 공병대로, 포병부대로 뿔뿔히 흩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최근에 다시 불거진 이회창씨 장남 이정연씨의 병역면제 의혹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터미널의 요금표 가깝게는 의정부와 멀게는 신철원, 육단리 등의 행선지가 표시되어 있다.
ⓒ 오마이뉴스 김정훈
서울 수유리의 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대복귀를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 지금 휴가 다녀오는 길인가?
김모 병장(이하 김) "지금 휴가 복귀하는 길이다. 2박 3일 포상휴가 다녀왔다."

- 고향은 어딘가?
김 "경북 구미다."

- 남부지방에 비가 많이 왔는데 피해는 없었나?
김 "주변에 피해는 많은 것 같은데 우리 집은 특별히 피해 없었다."

- 군 생활 몇 개월 남았나?
김 "3개월 남았다."

- 요즘 뉴스를 봤나? 한나라당 이회창씨 아들 이정연씨의 병역비리의혹 문제가 요즘 사회적으로 뜨거운 논란거리다. 뭐가 문제라고 보는가.
김 "별로 안좋다. 누구는 빽으로 군대 면제받고 없는 사람은 그냥 2년2개월 군생활 다 해야 하고 그런 게 안좋다."

- 본인은 주변에 빽 좀 없나?
김 "(웃음) 나도 신체 때문에 4급 나올 뻔 했는데 내가 (스스로) 군대 갔다."

- 당시 몇 킬로 나왔나? (실제 이 군인은 몸이 말라보였다)
김 "그때 신검받을 때 45.3Kg 나왔다."

- 현재 키가 몇인가?
김 "164~165 정도 된다. 먹기는 많이 먹는데 살이 안찌는 체질이다."

- 이정연씨의 179Cm에 45Kg이라는 체구가 상상이 가나?
김 "그 키에 그 몸무게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 터미널 입구에서 한 병사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정훈
목포에서 9박 10일의 정기휴가를 마치고 올라온 박모 상병은 약간은 냉소가 섞인 느린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박 "아들 두 명이 다 몸무게 미달로 걸렸다는 게 의심이 간다. 남자가 몸무게 미달로 걸리기가 힘들다. 솔직히 걸렸다면 안 가려고 둘 다 몸무게 줄인 것일 거다. 우리 같으면 그게 불가능한데, 그 사람이니까 가능한 거다."

- 그 사람이라면….
박 "말 그대로 그 사람들은 빽이 되지 않나. 능력도 되고."

- 본인은 주변에 빽 좀 없었나?
박 "서민이 무슨….(웃음)"

- 혼자 복귀하나?
박 "그렇다."

- 부대 내에서 동료들과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나?
박 "어차피 우리는 우리들끼리 모여서 고생하니까. 우리 자신이 중요하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안그래도 힘든데 그런 것까지 신경쓰면 열받는다."

- 보직이 뭔가?
박 "소총수다."

- 제대까지 얼마나 남았나?
박 "1년 남았다."

- 금방 올 것 같나?
박 "금방 안온다.(웃음)"

▲ 버스에 오를 준비를 하는 장병들
ⓒ 오마이뉴스 김정훈
곧 출발을 앞둔 버스 앞에서 서울에서의 마지막 담배를 피워 문 이모 병장은 제대가 넉달 남았다는 여유로움 때문인지 시종 넉살좋은 미소를 지으며 기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 보직이 뭔가?
이 "81mm 박격포다."

- 고생이 많겠다. 무게가 얼마나 나가나?
이 "42. 5Kg이다."

- 뭐가 제일 힘든가?
이 "행군이 많다. 많이 걷는 게 힘들다."

- 최근 병역비리 의혹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 "자식이 문제다. 굳이 면제까지 받아가면서 그럴 필요가 있는가?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창피한 일 아니겠나? 나 같으면 그냥 갔다온다. 26개월 얼마 되지도 않지 않나."

- 그래도 힘들지 않나?
이 "(그 정도도)힘들다면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나? 힘들다고 회피하고 도망가고 하면 안되지 않나. 할 건 하고…. 자신감이 중요하다."

오늘 복귀하면 내일 바로 제대한다는 안모 병장은 좀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호박씨 까는 것 아니겠나. 자기 자식은 (군대)안보내고 겉으로는 국방이 튼튼하다고 하고. 군인들 사이에서 안 좋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부대의 경우)병 사이에선 투표권 있으면 뽑지 말자는 인식이 있다."

서울 출신의 최모 상병은 애인과 함께 터미널에 나와 아쉬운 작별의 시간을 나누고 있었지만 기자의 질문에는 선뜻 응해주었다.

"많이 아파서 못오면 어쩔 수 없지만 굳이 비리를 써서 안올 것은 아니다. 어차피 10년을 하는 것도 아니고 2년만 하면 끝 아니냐. 눈치보지 말고 남자답게 와서 했으면…."

언뜻 보기에 영화배우 유오성을 닮은 듯한 심모 병장은 다소 어눌한 말투였지만 한편으론 모병제를 암시하는 듯한 대안도 조심스레 내놓았다. 그는 "억울하다. 남들 다 오는데. 억울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 이런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심 "앞으로는 (스스로)오게끔 하는 그런 식이면 좋겠다. 강제가 아닌 스스로 오게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그간의 군생활에서 가장 기억남는 게 무엇인가?
심 "훈련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히 힘든 훈련 뛰고 부대로 복귀하면 군악대가 나와서 환영연주를 해준다. 그러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 젊음으로 가득 찬 수유리
ⓒ 오마이뉴스 김정훈
취재가 끝나갈 무렵 매표소를 서성이던 남모 이등병을 만났다. 운전병 생활 5개월에 접어든 그의 말투는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번 병역비리 의혹을 바라보는 그의 생각은 단호했다.

- 병역비리의혹,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나?
남 "문제가 많이 대두는 되는데 나왔다가 금방 사라지지 않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방안도 중요한데 그게 부족하다. 국민들이 (병역비리를)나쁘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 고향이 어딘가?
남 "울산이다. 아침 8시에 출발해 이제 터미널에 도착했다(이때 시각이 오후 4시쯤이었다.)"

- 제대까지 얼마나 남았나?
남 "굉장히 많이 남았다 (웃음)"

- 제대일자를 알고 있나?
남 "2004년 6월 29일이다."

세상물정 어두운 청소년기를 지나 이제 불법적인 돈과 권력으로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다는 영악한 세상의 원칙을 그들은 '병역의무'라는 실질적인 체험을 통해 읽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영악한 세상의 원칙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만 않겠다는 사고로 든든하게 무장되어 있었다. 이날 하루 터미널을 거쳐간 장병들은 대략 50여명. 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부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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