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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르판의 이슬람사원
ⓒ 김미선
기차에서 내려, 걷는 동안에도 내내 졸음이 가시지 않는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 몸이 으실으실 하니 추워오는데도 사정없이 잠이 쏟아진다. 그대로 기차 안 침대칸에 누워 잠만 자면서 달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다들 푸석푸석하니 얼굴들이 퉁퉁 부어 있다. 서서히 여행독이 오르고 있는 것이다.

"삔관, 뤼관! 싸고 좋은 삔관 뤼관(호텔이나 여관)이 있어요!"
"투르판 특색의 아침식사 하고 가세요!"

천근만근처럼 내려앉는 잠생각을 '확' 달아나게 한 건, 아니나 다를까, 기차역 주변에 항상 장사진을 치고 있는 각종 삐끼들이다. 숙박업소 호객꾼에서부터 택시기사들, 식당종업원들까지 온갖 꾼들이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그중 한 택시기사가 유난히 '찝적'대며 따라온다. 대꾸도 안하며 걷고 있는 우리를 시종일관 따라다니며 지극정성으로 꼬셔대고 있다. 처음에는 투르판 시내까지 300위안을 부르던 그 양반은 시간이 갈수록 가격을 내리더니 급기야 100위안으로 합의를 보자고 조르기 시작한다.

베이징이든 상하이든 중국 어디서나 치러야하는 이 지겨운 흥정게임을 중국 서부의 끝자락 투르판에서도 봐야 한다는 사실에 그만 짜증이 나버린다. 새벽 댓바람부터 나와서 낯선 타지인들과 이런저런 줄다리기를 해야만하는 그들의 생활이 이해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다.

'그냥 타, 말아?' 마음 속이 오락가락하는 사이 "투르판 시내 5위안"하는 소리가 귀에 번쩍 들린다. 앞에 서 있는 일반 공공버스의 차장이 외치는 소리였다. 더 이상 망설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5위안짜리 버스다!

▲ 손오공이 파초산으로 불을 껐다는 화염산
ⓒ 김미선
버스가 출발을 하면서 내다보니 아까 전의 그 택시기사는 또 부지런히 어디론가 달려가서 다른 여행객들을 꼬시고 있다. 집요한 만큼 포기도 빠르고 재도전(?)도 빠른 그 기사의 뒷모습을 보니 괜한 짜증을 부렸다는 뒤늦은 미안함이 생긴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무슨 고상한 호객행위가 있을 것인가. 모름지기 생활이라는 게 바로 저렇게 호객하고 호객당하면서 적당히 길들여지고 적당히 피곤해져가는 일상이거늘.

아침 6시. 투르판은 여전히 깜깜한 밤중이었다.

호객꾼과 손님

버스의 종점인 쟈오통삔관(交通賓館) 앞에 내리니 날이 차츰 환해오고 있다. 눈은 아직도 졸립다. 역에서처럼 버스에 내려서도 삐끼아저씨들이 우리를 열렬히 '환영'해주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아저씨들의 생김새가 참으로 기묘(?)하다. 베이징이나 다른 여타의 도시에서 보던 중국인들과는 생김새가 완전히 다르다. 중동사람 같기도 하고 러시아사람 같기도 한 것이, 일반적인 중국인들의 생김새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베이징의 왕푸징 먹자골목에서 양고기 꼬치 구이를 팔고 있던 바로 그 위구르인들이었다. 한족을 제외한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비율이 다섯 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이다. 이들이 몰려 살고 있는 신장위구르족자치구는 중국영토의 6분의1을 차지할 정도로 가장 넓은 소수민족 자치구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지도를 펼쳐보면 이들의 땅은 서쪽의 맨 위에 위치해 있다. 이땅은 원래부터 완전한 중국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영토라는 뜻의 신장(新疆)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882년 청나라가 신장성을 설치한 이후, 예전부터 서역으로 불리워졌던 이곳이 그제서야 신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후, 1956년 다시 신장위구르족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정식 개명을 하였다.

중국의 새로운 영토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이곳은 또한 적지않은 아픔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상흔들이 남아 있다. 호객꾼과 손님처럼, 중국정부는 늘 이 땅의 위구르인들을 '호객'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좀체로 쉽게 호객되는 손님들이 아니다.

투르판 삔관이 가장 좋다며 자기와 함께 가자는, 역시 집요하게 따라붙은 한 위구르인 삐끼청년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우리는 거리 한복판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기사는 위구르인이 아닌 한족이었다. 어느 호텔이 가장 싸면서도 시설이 좋냐고 자문을 구했더니 그 기사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투르판 삔관을 추천한다. 삐끼청년을 따라갔더라면 택시비라도 아꼈을 것을.

▲ 투르판의 불교문화 유산, 베즈크리크 천불동
ⓒ 김미선
그러나, 그 위대한(!) 위구르인 삐끼청년은 '니네가 여기올 줄 내 다 알고 있었지'라는 듯한 표정으로 투르판 삔관 앞에 미리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렸던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또 그렇게 조우를 한 것인지는 몰라도 질기게도 우리를 따라왔다.

"거봐. 왜 내말을 못믿어요. 우리 위구르인들은 거짓말을 못한다구요."

파란눈에 곱슬곱슬한 머리의 그 삐끼청년은 얼굴 가득 유들유들한 웃음을 흘리더니 역시 그 다음 '본론'을 잊지 않는다. "오후에 관광할 거죠? 택시 갈아타고 다니려면 이것저것 불편할테니 내 차를 타고 관광하는 게 어때요. 택시비보다 싸면 쌌지 절대로 비싸게 안할게요."

어쩐지, 그 위구르인 삐끼청년이 밉지가 않다. 남을 사기치기에는 '눈빛'이 너무 선량했다. 신장땅을 떠날 때까지, 이들 위구르인들의 눈빛은 줄곧 그렇게 선량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들의 눈빛이 왜 그렇게 한없이 선량하게만 느껴졌는지….

그때는 그저 낯선 대상에 대한 어렴풋한 인상이겠거니 했다. 그 느낌은 위구르인들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르는 카스에 가서야 비로소 완전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것은 자기 땅에서 유배된 슬픈 이방인들의 그림자였다.

'거짓말을 못한다는' 그 위구르인 삐끼청년을 이번에는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의 차를 타고 손오공이 날아다녔다는 불타는 화염산의 도시 투르판을 우리도 한번 날아다녀보기로 한 것이다.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호객꾼의 꼬임에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 위구르인 삐끼청년은 거짓말 못한다는 예의 그 선량한 눈빛으로, 또 얼마나 많은 다른 여행자들을 꼬드겨 왔을까.

"내 신분을 공안국에 가서 조회해봐!"

투르판 호텔의 투숙 수속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여권이나 기타 신분증을 소지하고 오지 않은 나를 절대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무적인 표정으로 얼굴에 서비스용 미소조차도 띄우질 않는 호텔 프론트의 한족 여직원의 태도는 아주 단호했다.

어차피 방은 두 개 잡을 것이니 다른 두 일행의 여권만으로도 족하지 않느냐는 나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딱딱하게 규정만을 되풀이한다.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어보이는 그 규정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그녀를 보자니 속에서 열불이 치밀어오른다. 물론 절대적인 잘못은 나에게 있지만, 그래도 멀리서 찾아온 외국인 손님에게 너무 야멸차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내 신분을 정 못 믿겠으면 한번 투르판 공안국(경찰서)에 가서 컴퓨터로 내 여권번호를 조회해 보세요. 그럼 신분이 확실히 증명될 거 아니예요!"

▲ 화염산
ⓒ 김미선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대안이 없어서, 홧김에 '공안국 가서 조회해보라'고 질러댔더니 예상밖으로 그 한족 여직원의 태도가 달라졌다.

"정말 공안국에 신고를 해도 된단 말이죠?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단 이 종이 위에 손님 여권번호와 베이징 주소, 전화번호를 적으세요."

그렇게 해서 안될 것 같아보이던 호텔투숙 수속이 의외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수속을 하는 내내 '통밥'을 굴린 건, 그녀가 진짜로 공안국에 신고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특성상, 그렇게라도 형식과 절차를 갖춘 폼을 취해 조금 전의 딱딱한 서비스 태도를 만회하려는 것이겠거니 하는 혼자만의 미련한 통밥을 굴리고 있었다.

'보기에 범죄자도 아니고 멀쩡해보이는 손님을 공안국에 신고한다는 것이 어디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겠어. 그것도 외국인인데'라며 혼자서 똑똑한 상상은 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역시 '규정집'이었다. 진짜로 나를 신고해버린 것이다. 진짜 투르판 공안국에 말이다. 그 재미있고(?) 기발했던 '공안사건'은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우리에게 잠자리를 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그녀에게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솔직히 그녀의 칼같은 태도에 같이 얼음장 같이 맞서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쫄아있었던 게’ 사실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공손하게 애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큰소리를 쳤던 나의 그 무례한 태도에 ‘규정대로’ 복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위그르족 자치구라서 더 엄격한 규정을 적용했던 것일까.

포도가 익어가는 화염(火焰)의 도시

신장위구르족 자치구의 중앙으로는 거대한 톈산(天山)산맥이 관통을 하고 있다. 이 톈산산맥을 기준으로 북쪽 신장과 남쪽 신장으로 갈라지는데, 옛 실크로드도 바로 이 길을 따라 톈산남로와 톈산북로로 갈라졌다. 그 길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통하는 많은 서역의 도시들은 그 당시 모두 실크로드 위의 오아시스 도시들이었다.

▲ 투르판의 위그르족 아이
ⓒ 김미선
톈산산맥을 따라 투르판과 카스간의 남쪽 신장으로 연결되는 기차길은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길일 것이다. 사막과 초원, 좁다란 협곡과 우람한 산맥을 지나 만년설의 고산들을 끼고 달리는 그 기차길 위에는 여행자들의 가슴을 한없이 설레게 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그림'들이 기가 막히게 펼쳐져 있다. 그것을 보고 나서는 마치 '죽어도 좋을 것만' 같다.

투르판이 그렇게 아름다운 오아시스 도시인지 아닌지는 판단을 잘 못하겠지만, 포도와 화염산 만큼은 진짜 '따봉'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베즈크리크 천불동 아래에 무뜨끄허라는 그림에나 나올 듯한 아름다운 시냇가 옆에 자리잡은 다섯 살짜리 귀여운 꼬마 얼큰이네 집과 그 가족들이다. 그들 역시 투르판의 달고 맛있는 포도와 불타는 화염산 못지않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동화'로 기억되고 있다.

예로부터 포도와 하미과 등의 여름과일 생산지로 유명한 투르판은 세계에서 사해(死海)다음으로 해수면보다 낮은 분지에 있는 '저지대'이다. 투르판이라는 지명 자체도 위구르어로 '저지대'라는 말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일년내내 거의 비가 내리지 않고 불타는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기온이 높은 곳이라 '불의땅'이라는 또 다른 옛 지명을 가지고 있다.

6월-8월사이에 투르판을 찾으면, 거의 데어죽을 것 같은 고온의 폭염이 기다리고 있다. 지표면의 온도는 최고 70도까지 올라가고 그 동안의 최고기록이 82.3도였다고 하니 '불의땅'이라는 옛 지명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스팔트 위에 계란을 깨뜨리면 그대로 후라이가 되고, 벽에 밀가루 반죽을 붙여놓으면 그대로 빵이 되는곳이 바로 이 투르판이다. 그래서 포도와 과일들이 가장 달고 맛있게 영글 수 있는 땅이기도 하다.

우리가 찾아간 때는 아직 투르판의 포도들이 채 영글기 전이다. 포도구를 따라 나 있는 긴 포도밭 위로는 영글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포도송들이 한참 몸집을 불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린 포도송이들이 매달려 있는 포도나무 덩굴들 사이로는 춤과 노래에 능한 위그르족 아가씨들의 이국적인 눈동자들이 작은 포도알들처럼 알알이 맺혀 있다.

낯선 이방인들과 그 포도알 같은 눈들이 마주칠 때면, 어김없이 그 눈들은 우리를 향해 활짝 웃는다. 그녀들의 한없이 선량한 눈동자 속에는 '죽어도 좋을만큼' 달고 맛 있는 투르판의 포도과즙 같은 달콤한 눈망울들이 곱게 물들어 있다.

지금쯤 투르판의 포도들도 그 고운 눈망울들처럼 막 탐스럽게 영글어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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