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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튼 미 국무차관은 29일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거듭 지목하며, "이것은 수사학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라면서 "이들 3개국 지도체제가 같고, 3개국 체제간에는 강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방한중인 볼튼 차관은 이날 힐튼호텔에서 가진 한미협회 주최 강연에서 "북한은 주민들을 굶기면서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팔고 있다"고 시종일관 강조하면서, "신속한 개혁과 외부세계와의 관계 개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북한의 생존 여부는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리 두 나라의 용감한 군대(한미동맹)는 악의 정권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말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행정부의 대북관을 거듭 확인했다.
이러한 볼튼 차관의 대북 강경 발언은 공교롭게도 '다른' 힐튼호텔(그랜드 힐튼)에서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2차 회의가 열리고 있는 때 나온 것이어서, 향후 한반도 정세의 난맥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북한에 전력 보상할 뜻 없어"
볼튼 차관은 특히 북미간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제네바 합의와 관련해, "북한이 제네바 합의의 즉각적인 이행에 돌입하지 않을 경우 제네바 합의의 미래는 심각한 우려에 빠질 것"이라며,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영속적으로 지속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해 제네바 합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는 대신에,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전력 손실 보상을 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경수로 사업이 지연된 것은 전적으로 북한의 책임이기 때문에 전력보상을 할 이유가 없다"고 답변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반대급부를 제공하지 않고 핵사찰 수용을 관철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또한 "북한의 과거와 현재 핵활동을 효과적으로 밝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이 이뤄질 때까지, 경수로 핵심부품은 인도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중단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과거는 물론 현재의 핵활동까지 문제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동결된 영변 핵시설 이외에도 북한이 핵시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규명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강경한 태도는 98년 금창리 핵의혹 시설이 '텅빈 동굴'로 판명났듯이 정확한 정보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대북 '불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볼튼 차관은 북한이 생물무기금지협약(BWC)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물무기 프로그램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 화학무기금지협약(CWC) 가입을 촉구하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화학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미사일 수출 국가라는 점 등을 강조하면서, 소련의 멸망을 예로 들면서 "오늘날 북한은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시 행정부의 북한 공격 가능성에 대해서는 지난 2월 부시 대통령이 방한 때 한말을 인용해, 미국은 어떤 방법이나 형태로도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예측불허의 한반도 정세
최근 한반도의 화해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볼튼 차관이, 그것도 서울에서 북한에 대해 '악의 축', '악의 정권' 등 초강경 표현을 동원해 비난하고 나옴으로써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은 한층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 국무부가 볼튼의 서울 방문에 앞서 "그의 발언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어, 볼튼의 강경 발언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관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볼튼 차관이 북미간의 핵심 현안이 되고 있는 제네바 합의 이행 문제와 관련해, 유력한 협상안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조기 핵사찰 수용'과 '미국의 대북전력손실 보상'을 맞바꾸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북미대화가 열려도 성과를 낳기는 더욱 어렵게 됐다.
이러한 와중에서 북미간의 첨예한 입장 차이를 조율하고 중재해야할 남한의 정치 현실은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잇따른 아들 비리와 총리 인준 무산으로 레임덕이 가속화되고 있는 김대중 정부나, 병역 비리를 놓고 사생결단식의 정쟁을 벌이고 있는 여야의 정치 현실을 고려할 때, 예상되는 한반도의 위기를 헤쳐나갈 내적 역량을 찾아보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볼튼 차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평화네트워크홈페이지(www.peacekorea.org)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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