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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차(維歲次) 2002년 8월29일에, 대한문 앞에서 대한민국 모씨(某氏)는 경술국치일을 맞이하여 두어 자 글로써 덕수궁에 고(告)하노니, 인간 세상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문화재이로되,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이 덕수궁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같은 궁궐이나, 이렇듯이 너를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라, 원통하고 불쌍하다. 네가 이 세상에 탄생한 지 우금(于今) 수백 년이라.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을 겨우 진정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세상에 고(告)하노라.

연전(年前)에 남녀가 데이트할 곳을 찾노라면, 명동의 돌체다방, 본전다방에 르네상스, 필하모니, 몽셀통통을 추천하였으나 그 모두를 마다하고 그 중에 너를 택하여 돌담길을 걷다가 노란 낙엽이 빨갛게 물들고 눈이 오고 봄이 오고 급기야는 백년해로를 맺었고 오직 배필 하나 잘 얻은 것과 토끼 같은 자식들 키우는 재미로 행복을 구가하다가, 요 몇 달 전 청천벽력 같은 소문에 접하였으니, 오호 통재라, 이는 분명코 양키귀신이 시기하여 민족의 정기가 서린 명당자리를 차지하여 우리나라를 영원한 식민지로 삼고자함이로다.

애통하다 덕수궁이여, 그 동안 네가 당한 수모와 능욕에 대해 무지하다가 최근에야 발등에 불똥이 떨어지고서야 너에 대해 드문드문 알게되었으니, 구한말 외세의 각축장이 되어 갈기갈기 찢기고 할퀴다가 왜놈들이 너를 반신불수 병신 만들려고 허리를 두 동강내서 만든 길이 왕년에 폼잡고 걷던 '덕수궁돌담길'이요, 임금들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던 선원전 위에 경성제일여학교를 지었으니 우리들이 오늘 꾀할 일이란 옛 궁궐을 복원하여 후세인들에게 자랑스런 문화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하거늘 작금 전개되는 사태는 실로 심각하다 아니할 수 없도다.

분통하다 덕수궁이여, 양키놈들은 이미 돈주고 산 땅이요 당연한 권리요 하며 기어이 선원전 터에 고층 아파트와 대사관을 지어 최첨단 외교단지를 구축하고자 획책하니 이 난리가 임오년에 망아지 대신 양키가 날뛰는 임오궁란(壬午宮亂) 아니고 무엇이겠느뇨. 세상 천지에 조상의 얼과 혼이 서려 있는 문화유적지에 이민족이 코골고 자빠져 잘 아파트를 짓겠다고 하는 것을 좋아할 민족이 어디 있겠느뇨.

허나 한탄스럽게도 을사오적이 21세기에 다시 되살아나고 있으니 이 또한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로다. 이명박이란 자는 시장이 되기 전에는 문화재 보호와 아파트신축 반대로 환심을 사 서울시장에 취임하기가 바쁘게 미국놈들과 비밀회동을 하더니 '법대로 하자'며 말을 바꿔 워싱턴시장이 되어버렸고, 정부에서는 외교통상부, 건설교통부, 문화관광부, 서울시 등과 매국노가 되기를 결의하고 나섰으니 덕수궁이여, 이 사변을 어찌하면 좋겠느뇨.

아깝다 덕수궁이이여, 어여쁘다 덕수궁이여, 너는 우아한 자태와 미려한 모습으로 연중 수백만의 세인들을 품에 안아 너로 하여금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익히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문화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민족자주정신을 갖도록 계획하였으나 자칫 너를 영원히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러 정신이 산란하고 혼백이 아득해 기절 혼절하였다가 정신을 차려 달력을 쳐다보니 오늘이 바로 8월 29일 제 2의 경술국치일 이로다.

우리는 특별한 재주는 갖고 있지 못하나 오직 애국 애족의 단심으로 똘똘 뭉쳐 너를 되살려 죽어가는 문화주권을 회복하고 또한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어여쁘고 착한 미선이 효순이 여중생들의 한을 풀어 줄 사법주권을 되찾아 다시는 이 땅의 백의민족이 양키에 의해 팔다리가 잘리는 일도 장갑차에 깔려죽는 일도 유구한 문화재를 침탈 당하는 일도 없게 하고자 한이 많이도 서린 대한문(大恨門) 앞에 엎드려 너에게 고(告)하노라.

누를 탓하며 누를 한(恨)하리오. 네 비록 항상 시내 한복판에 있어 사람들이 그 귀함을 모르고, 구태가 의연한 구캐의원들은 진흙탕싸움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양키놈들은 호시탐탐 어수선한 틈을 타 너를 작살내려 하니 정신을 깨쳐 후세에 욕됨이 없도록 맹글어보고자 하노라.
오호애재라, 덕수궁이여, 바위가 흙으로 변할 때까지 동해물이 마를 때까지 무쇠로 지은 소가 무쇠 언덕에서 무쇠풀을 다 뜯을 때까지 아으~ 다롱디리~ 천년만년 영원하여라,
덕수궁이여, 문화민족이여, 민족자주정신이여,

덕수궁이여, 오늘은 이렇게 애닮은 노래를 하나 이 다음에는 오호애재나 오호통재가 아닌 6월을 바로 이곳에서 붉은 악마들이 미치도록 노래하고 춤추었듯이 오호쾌재와 얼씨구 좋구나를 노래할 수 있는 날이 조속히 오기를 바라며.

이천이년 임오년 팔월 이십구일 제 2의 경술국치일을 맞이하여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반대 시민모임

상향(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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