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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것보다 하루가 늦었지만, 이번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태극기와 인공기 그리고 한반도기의 사용범위와 위상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했다는 조선일보의 30일자 사설 "북이 요구하면 태극기도 포기한다"(인터넷에는 29일 17시48분 기사 입력)가 게재되었다.
이전의 사설과는 달리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동시 입장하는 데 대해 반대한다"고 조선일보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으니, 이전 기사의 경우처럼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조선일보>의 입장을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덜게 된 셈이다.
<조선일보>는 이번 사설을 통해 개·폐막식 때 한반도기를 앞세워 동시 입장한다는 점과 북측 응원단의 인공기 사용을 문제삼고 있다. 여기서 일단 분명한 것은 한반도기를 앞세운 동시 입장과 북측 응원단의 인공기 사용 등의 문제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만큼,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와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일보>가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치면서 보이고 있는 논리적 오류와 모순, 편향된 시각 등이 우려할 만한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민족' 아니면 '국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는 문제인가?
21일자 <조선일보> 사설에서도 그러했지만, <조선일보>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은 "태극기=국가", "한반도기=민족"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한반도기'를 선택하는 것은 '태극기'를 내리는 일, 즉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누차 강조해서 말하지만 태극기가 대한민국의 국가 상징이고, 한반도기가 민족화해의 염원을 상징한다는 것에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그런데 조선일보의 논리에 따르자면, '한반도기'를 선택하는 것은 '태극기'는 버리는 것, 다시 말해 한반도기 아니면 태극기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는 이야기가 된다. "민족"을 선택하는 것은 "국가"를 버리는 일이 되고, "국가"를 선택하는 것은 "민족"을 버리는 가혹한(?) 선택이 <조선일보>의 주장 안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 한반도기를 사용한 동시 입장을 지지하는 76.8%(28일 연합뉴스가 TNS코리아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의 국민은 "민족"을 선택하고 "국가"를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자신들 스스로도 이전 사설을 통해 이번 부산 아시안게임이 남북 화해 협력과 국위 선양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혀놓고, 이번 대회에 북한이 참가하는 것이 "협상전략"일 가능성, "체제 선전"일 가능성, "통일전선 이벤트"일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우리가 돈까지 지불한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고 있다. 부산 아시안게임이 남북 화해 협력과 국위 선양에 도움이 되길 바라다는 조선일보의 방식은 참으로 독특하다.
체제 선전과 통일전선 이벤트(?)
동시입장 때 한반도기를 사용하는 것과 북측 응원단의 인공기 사용, 북측의 대회 참가 비용 지원을 합의한 이번 결정에 대해 <조선일보>는 "대한민국 안에서, 대한민국 돈으로 자기네 체제선전과 통일전선 이벤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며 '분노'에 가까운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한 해에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이라는 대규모의 국제 경기를 개최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회참가 비용까지 지원 받아 참석하는 북한의 체제가 이번 부산 아시안게임을 통해 누구를 대상으로 어떠한 선전을 펼칠 것이라고 파악했기에 <조선일보>가 이토록 분노하는 것일까?
북한 선수단의 경기와 응원을 보면서 북한 체제가 우수하다고 판단할 우려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조선일보>가 남한 사회의 체제에 대해 일반 국민 이하의 신뢰감을 지니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남남갈등을 야기하고 위기감을 조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누가 태극기의 이념과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가
태극기의 이념과 가치를 훼손하는 일은 <조선일보>의 비뚤어진 논리처럼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입장 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태극기의 가치를 가장 철저하게 말살하려 했던 일제 하의 친일인사들, 대한민국의 이념과 가치를 담고 있는 헌법을 유린했던 자들, 부정 축재와 병역비리 등의 온갖 치부를 드러내는 기득권층에 대해서 <조선일보>는 어떠한 태도를 보여왔는가?
장갑차에 깔려 숨진 여중생의 죽음 앞에서 <조선일보>는 어찌하여 "미국이 요구하면 독립국가의 최소한의 자존심도 재판권도 다 포기한다?"라는 사설은커녕, 항의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가? <조선일보>가 이야기하는 대한민국의 이념과 가치에는 수구냉전 논리 하나밖에 없는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사설] “北이 요구하면 太極旗도 포기한다”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태극기와 북한 인공기(人共旗)의 사용범위와 위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남북관계의 변화 속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확립해 나갈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그만큼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다.
태극기는 ‘한민족’보다는 ‘대한민국’의 이념과 가치를 담고 있는 최고 상징물이며, 그 어떤 편의적 목적을 위해 간단히 내팽개칠 수 있는 종속물이 아니다. 또한 아시안게임은 민족단위가 아닌 국가단위로 참가하는 행사이며, 더구나 대한민국은 이번 대회의 주최국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회 개·폐막식 때 남북한 선수단이 태극기나 인공기가 아니라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동시 입장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정부가 엊그제 남북 실무접촉을 통해 개·폐막식 때 태극기를 포기하고 한반도기를 사용키로 북한에 서둘러 합의해준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현 정부가 국가 정체성과 체통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전문가들의 깊은 검토와 충분한 국민적 여론수렴 과정을 차단한 채, 쫓기듯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는 데만 급급했다는 질책을 모면할 수 없다.
남북 합의내용대로라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은 대회 참가비용을 대부분 남측으로부터 지원받으면서도 마치 공동개최국 같은 위상을 확보하게 됐다. 결국 북측으로서는 대한민국 안에서 대한민국 돈으로 자기네 체제선전과 통일전선 이벤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정부는 최소한도 북한에서 국제대회가 열릴 경우도 북측이 인공기를 포기하고 한반도기를 앞세우며, 또 응원석에서 태극기 사용을 하게 한다는 보장이라도 받아냈어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인공기가 휘날리게 된 반면, 북한에서는 지원물자를 실은 우리 선박마저 태극기를 내려야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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