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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로 서 있는 이승복

▲ 이승복 기념관 본관 전시실 전경(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소재)
ⓒ 이승복기념관
재작년이던가? 동해안에서 열린 건축 관련 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다. 전국의 건축학과 학생들을 상대로 한 섬머스쿨이었는데, 여기에서 나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건축'에 관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행사장은 이미 폐교가 된 어느 초등학교의 건물.

도착해서 일단 짐을 풀고 교정을 거닐다가 문득 교정 한편에 서 있는 싸구려 석고로 제작된 허연 흉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형태로 보아 멀리서도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임을 알 수 있었다. 동상을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기라도 할 것이지….

그 옛날 저 동상은 전국의 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모든 어린이의 사표로 추앙을 받았던 몸. 하지만 이제는 그 효용가치도 다 한 듯, 이 가련한 아이는 버려진 학교의 휑한 교정에 홀로 책 보따리를 끼고 서 있었다.

북괴의 잔학함과 우리의 반공의지의 굳건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 아이는 아직도 저렇게 밤에는 이슬을 맞고, 낮에는 뜨거운 땡볕을 쬐며 서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 모습이 보기에 너무나 안쓰러워, 씁쓸한 마음에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세워질 당시만 해도 반공의 사표였는지 모르나, 이제 그 동상은 한 시대의 광기의 상징으로 변해 가는 중이다. 죽은 그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었던 사람들에게 버려진 그 동상은 이제 세인의 기억 속에서 까맣게 잊혀지거나, 혹은 과장된 증오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던 한 시대를 대표하여 그 조그만 몸으로 모욕을 당하는 일만 남은 듯하다. 저 가련한 아이가 바람에 깎이고, 비에 씻겨, 마침내 그가 잠들어야 할 대지로 돌아가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까?

시나리오1-신화의 탄생?

이승복 어린이를 둘러싼 논란에 관해서는 비교적 관심을 갖고 <조선일보>와 시민단체 측의 상충되는 주장을 모두 읽어본 바 있다. 판사님이야 무슨 생각에서 그런 판결을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나보고 판결을 내리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이승복 기사는 순수 작문이었노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기사의 작문 여부가 도대체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부조리한 초현실주의적 상황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앞으로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되돌아보면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부조리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가 여전히 잔인하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리라.

강원도 산골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어린이가 있었다. 학교에서 매일 공산당이 나쁘다고 배웠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집에 느닷없이 그 공산당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어린이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외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공비들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도 소년은 굴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마침내 그들의 우악스런 손에 입이 찢겨져도 소년은 끝까지 외쳐댔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어쨌든 우리는 이런 것을 사실로 믿으라고 배웠고, 심지어 그 정신을 본 받으라고까지 배웠다. 나는 물론 그게 사실이라고 믿지도 않고, 나아가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고명하신 판사님의 판결도 나의 이 믿음을 번복하지는 못한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공식적 버전의 시나리오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날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증언해줄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방송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석연찮은 진술을 했다가 다시 번복한 이승복의 형은 불행히도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물론 문제의 기사를 작성한 당시의 <조선일보> 기자는 아직 살아 있지만, 그도 그날 현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증인이 될 수는 없다.

그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당시에 자기가 정말 사건현장에 그런 얘기가 떠도는 것을 직접 들었다는 것 정도이리라. 어쩌면 그는 그 얘기를 누군가에게서 정말로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가 그 얘기를 이승복의 형에게서 직접 들었을까? 솔직히 나는 그것조차 의심한다.

아무리 철없는 아이라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총칼로 무장한 험악한 일군의 사내들 앞에서 앞에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반공정신을 과시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보다 더 합리적인 가설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이것은 물론 하나의 가정, 하지만 내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정이다.

무장공비가 집안에 들어와 위협하자. 소년이 공포에 질려 울기 시작한다. 공비들은 울음을 그치라고 다그치나 그럴 수록 소년은 더욱 더 공포에 질려 큰 소리를 낸다. 이 울음을 참을 수 없었던 공비들이 그를 때리고, 그럴 수록 소년은 더욱 더 크게 운다. 잔혹한 살인교육을 받고, 적진에 투하되어 심리적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 있던 공비가 흥분해서 그의 입을 찢는다.

장면은 사건현장으로 바뀐다. 경찰이 시신을 수습한다. 주민들과 기자들이 몰려온다. 살해당한 소년의 입이 찢어져 있는 것을 본다. 사건현장에 있던 사람, 아니면 현장에는 없었지만 보도나 입 소문을 통해 살해당한 소년의 입이 찢어져 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라면 당장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아니, 왜 공비들이 하필 소년의 입을 찢었을까?"

아마도 소년이 그 입으로 밥을 많이 먹는다는 사실이 기분 나빠서 죽였다고 믿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이 물음에 금방 하나의 어법을 떠올릴 것이다. 즉 '입이 찢어져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속담, 즉 한국어 사용자에게는 아주 익숙한 어법이다. 입이 찢어져도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럼 그 상황에서 할 말은 무엇이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공산당이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말일 게다. 그렇다면? 혹시 '공산당이 싫어요'?

자, 그 발언이 이렇게 일종의 민중창작이었다고 가정하자. 누군가 별 생각 없이 이렇게 한 마디 한 것을, 우연히 기자가 주워듣는다. 그리고 그 증언(?)에 기반해 기자는 기사를 써서 송고한다.

예상외로 기사는 대히트를 치고, 신고 직후 정신을 잃었던 이승복의 형이 깨어났을 때, 그것은 이미 사실로 굳어져 버린 상태다. 승복이는 이미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형은 이제 그 사실 아닌 사실을 추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깨닫는다.

이제 그것은 그의 증언이 된다. 사건은 그의 손을 떠나 자기 동력을 갖고 확대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전국의 초등학교 교정에 우후죽순처럼 돋은 이승복 동상들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가 살던 마을은 반공의 성지가 된다. 후에 이승복의 형은 석연찮은 증언을 남기나, 이미 대세를 뒤엎기에는 늦었다. 그는 부랴부야 발언을 번복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설, 내가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가장 무리가 없는 가설이다.

시나리오2-반공소년?

▲ 이승복 동상,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이승복 기념관
물론 이 부분은 앞으로 이어질 재판과정에서 더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논란과 관계없이 이미 이승복 신화의 허구는 드러났다. 여기서 이제 또 하나의 가정으로 넘어가자. 이 가정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즉 이승복 신화의 진리성을 굳게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

언젠가 <월간조선>의 이동욱 기자가 이승복 기념관의 관장을 맡고 있는 그의 옛 선생님을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승복 사건이 허구라는 것을 강하게 부정하는 그도, 초등학생이 그 상황에서 용감하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고 믿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승복을 기념하는 그의 생각은 '아마도 철없는 아이가 별 생각없이 한 말을 공비가 주워듣고 격분해서 입을 찢은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승복 신화는 그야말로 거대한 규모의 거국적 해프닝이었던 셈이다. 생각을 해 보라. 철없는 초등학생이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졸지에 '반공정신의 표상'으로 둔갑해, 전국의 어린이들이 따라 배워야 사표가 되었으니, 해프닝도 이런 해프닝은 세상에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초등학교 교정에 우후죽순처럼 솟은 이승복 동상들은 그의 투철한 반공정신을 기리는 게 아니라, 기껏해야 그의 '철없음'과 '생각없음'을 기념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철없음'이나 '생각없음'은 사회적으로 기념해야 할 덕목(?)이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정작 인터뷰를 하는 <월간조선>의 기자나 이승복을 기념한다는 곳의 관장을 맡고 계신 분이나, 공히 이 모순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 이들의 주장대로 이승복 어린이가 너무 어려 아직 철이 없어서 별 생각 없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가 격분한 무장공비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상식적으로 그것은 무장공비의 잔인함을 말해주는 징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이승복 어린이의 투철한 반공정신을 웅변하는 징표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부른 것은 투철한 반공의식의 표출이 아니라 철없는 아이의 생각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승복의 뭘 기념하겠다는 것인가? 내가 이 상황을 부조리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이 황당함이 우리 사회에서는 이상하게도 황당함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이번 법원의 판결을 보며 느끼는 감정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 황당한 판결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황당하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이승복이 실제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문제의 기사를 작성한 그 기자에게 묻자. 당시 그 기사를 쓸 때에 당신은 이승복이 했다는 이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는가? (1) 글자 그대로 '이승복 어린이가 용감하게 반공을 외치다가 순국을 했다'는 의미를 부여했는가? 아니면 그 기사의 요지는 (2) '이승복 어린이가 철이 없어 실수로 그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발언을 했다가 격분한 무장공비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것이었는가?

만약 그 기사로써 (1)을 의미했다면, 그것은 이제 이승복 기념관의 관장님조차도 안 믿는 내용이라고 지적해 둔다. 만약 (2)를 의미한 것이라면, 그는 자기의 보도가 초래한 그 엄청난 부조리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 왜? 내가 기억하는 한 이승복 신화의 의미는 분명히 (2) '실언으로 인한 참극'이 아니라 (1) '투철한 반공정신의 표출로 인한 반공주의 순교'였기 때문이다.

기자에게는 자기의 보도의 취지가 왜곡돼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재료로 악용되는 것을 저지할 도덕적 책무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입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라 그랬다 치자. 그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물음에 꼭 대답하기 바란다.

시나리오3-조선일보의 '반공 아빠들'께

이승복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발언의 사실여부가 아니다. 설사 이승복이 그런 발언을 한 게 사실이고, 그 발언을 한 동기가 <조선일보>에서 선전해 왔듯이 투철한 반공정신의 실천이었다고 치자. 그럼 이로써 우리는 세 번째 가정으로 넘어온 셈이다. 현재까지는 이 가정이 그 사건을 설명하는 공식적 시나리오로 인정받고 있다.

<조선일보>는 바로 이 사나리오를 영원히 사실로 확정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게 설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아니, 이게 사실일 경우에 실은 가장 큰 문제가 남는다. 말하자면 이게 사실로 드러날 경우,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단 하나, 한국의 반공주의가 소름끼치도록 극악했다는 것 뿐이다.

이 사안에서 정작 문제삼아야 할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말하자면 <조선일보>의 보도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해석하는 틀 자체의 잔인성이 여전히 반성되지 않고 있다는 것. 그게 이 사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가 공산주의의 문제를 알면 얼마나 알고, 자유민주주의의 장점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아무리 반공이 중요해도 그렇지, 도대체 아이를 얼마나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길래, 총칼로 무장한 공비들 앞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가 버젓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칠 지경이 되었겠는가?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상황인가?

더 큰 문제는 이것을 전국의 초등학생들에게 따라 배우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승복의 경우는 특이한 경우라 치자. 이미 일어난 일을 번복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위험은 미리 예방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으면, 아이들에게는 일단 아무리 반공이 중요해도 적어도 그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할 일이다.

애들이 이념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빌어먹을 이념보다 더 소중한 게 일단은 아이들의 생명이 아닌가? 그런데 동상까지 세워가며 그런 철없는 아이들에게 이승복을 따라 배우라고 가르쳤다. 한 마디로 반공의 순교자가 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물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순교가 위대해도, 그것을 아직 판단능력을 갖추지 못한 철없는 아이들에게 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순교를 요구하는 정치도 문제겠지만, 설사 순교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철저히 자기의 주체적 판단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초등학생은 공산주의 체제의 문제점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관해 자기 자신의 주체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어리다. 더더군다나 그 어린 생명들은 어른들의 이념을 위해 죽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인의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의 반공주의자들이 저지른 짓을 보라. 이게 인간의 두껍을 쓰고 할 수 있는 짓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조선일보>의 '반공 아빠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휴가를 내서 가족들과 함께 우연히 강원도에 놀러 갔다고 하자. 마침 북한의 잠수함 한 척이 그물에 걸려 해안에 좌초하고, 거기에 탑승했던 병사들이 무장을 한 채 상륙을 했다가, 우연히 당신들이 머무는 산골의 민박집에 들이닥쳤다고 하자.

자, 당신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반공 아빠들은 뭐라고 가르칠 것인가? 저 가증스런 북괴 도당들의 위협에 굴하지 말고 용감한 이승복 어린이를 본받아 힘차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라고 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대들의 드높은 반공정신만은 길이길이 상찬을 받아 마땅하나, 앞으로 인간 대접받기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광신적 반공주의의 몰상식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위에서 세 개의 시나리오를 얘기했는데,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은 세 번째이다. 이게 사안의 본질이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싸움을 벌일 장소를 고르는 것이다. 싸움은 상대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해야 한다. 이 세 번째 전선에서 싸움만으로도 이미 대세를 결정할 수가 있다. 시나리오 2로 보조전선을 치고 기동전을 펴면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난 것이고, 시나리오 1은 패잔병들을 쫓아버리는 것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물론 조선일보는 시나리오 1에 전선을 치려고 할 것이다. 그곳이 그들이 싸움을 벌이려고 원하는 장소다. 서해교전의 경우, 진보진영에서는 연평총각의 말을 믿고 어민의 월선조업 책임론에 기반하여 전선을 폈다. 바로 그 지점은 조선일보가 진보진영을 몰아넣고 싶어하는 곳, 한 마디로 수구세력의 십자포화망의 한 가운데에 진을 친 것이다. 앞으로 이념적 경직성에서 비롯된 이런 비합리도 극복되어야 한다. 원래 닭머리로는 한 걸음도 진보를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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