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희망의 21세기를 맞이한다며 요란하기만 했던 지난 2000년 12월경. 서울시를 비롯해 각 지방자치체나 사업체들을 중심으로 대결과 증오의 20세기를 떠나보낸다는 의미에서 타임캡슐을 묻는다 어쩐다 하며 한바탕 소란을 피운 적이 있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독자들 중에는 자신만의 유산과 기억을 오래오래 남기기 위해 집뒤뜰이나 앞마당에 나름의 타임캡슐을 묻은 기억이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타임캡슐이라야 고작 몇십 년, 길어야 1백년 후에 열어보기로 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솔직히 그때 가서 열어본다 한들 대부분의 물품들이 아직 우리 주변에서 쓰이고 있거나 쓰이진 않더라도 조금만 수고하면 쉽게 구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 1800여 년만에 개봉된 타임캡슐이 있어 소개하려 한다. 특히 매설된 뒤 근 2천년만에 개봉되긴 했지만 그 개봉작업이 한번에 끝나지 않고 거의 2백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는 점 또한 특기할 만하다. 자신이, 그 시대가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동작 그만!'을 외치며 땅속으로 사라져 거대한 타임캡슐로 남은 고대의 도시, 서기 79년 8월 24일, 폼페이.
폼페이는 세계적 미항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피레네산맥 쪽으로 약 12km 들어간 베수비오산 남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지금이야 내륙에 위치한 도시가 되었지만 타임캡슐이 될 당시까지만 해도 베수비오산 남동쪽에 위치한 사르누스강 하구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다. 이랬던 도시가 나폴리와 폼페이 사이에 위치한 유럽 대륙 유일의 활화산 베수비오산이 폭발함으로써, 한때 로마제국 농업과 상업 중심 도시 중 하나에서 일순간 '타락과 오욕의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인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즉 당시 폼페이 인구 2만여 명 중 약10%에 해당하는 2천여 명이 목숨을 잃은 이 재앙으로 폼페이는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탄 아래 아무런 저항 없이 사뿐히 묻히게 된다.
그런데 현대인은 지극히 이기적인 것일까. 이 사고가 당시 시대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불행하고 두려운 일이었겠지만, 삽시간에 도시 전체가 어떠한 조작이나 가식 없이 고스란히 땅속에 묻힘으로써 고대 생활사 연구에 큰 획을 긋는 타임캡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다가 식탁에 둘러앉은 채 그대로 최후를 맞이한 가족과 그 식당 오븐 안에서 반쯤 구워진 것으로 보이는 빵. 화산이 폭발했다는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집을 나와 몸을 피하다가 재물이 아까워 다시 그것을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석을 두 손에 움켜진 채 굳어버린 남자. 아기를 감싸안고 죽어간 모성 등… 서기 79년 8월 24일 아침의 어느 순간을 간직했던 폼페이가 땅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근 1800년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가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되면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된 폼페이는 둘레가 약 3km에 이르는 타원형의 도시로,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이 성벽을 따라 8개 정도의 문이 나 있고, 마차가 달릴 수 있을 만큼 널따란 길이 직선으로 도시 내부를 촘촘히 연결하고 있다. 도로를 반듯한 돌로 포장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도로 양옆으로는 인도가 있어 당시의 보행자를 대하는 대우가 오늘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도로와 인도 사이에 배수구로 보이는 흔적들이 있고 길모퉁이에는 공동 수도로 보이는 시설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로마 시대의 공공시설 수준이 간단치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또한 폼페이 안에서 지금껏 발굴된 목욕탕만도 네 군데에 달하며, 원형 극장과 반원형 대극장도 발굴되어 관람객이 잠시 앉아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규모 못지 않게 폼페이가 주는 놀라움은 현대 이탈리아인들의 그 '느릿한 여유의 철학'이다. 인근 지역에서 일을 하던 농부들에 의해 수 차례 벽돌 조각 등이 발견되어 무언가가 지하에 있을 거란 예상을 하긴 했지만, 16세기 들어서야 소규모 발굴 작업이 시작된 후 178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된 후, 아직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발굴작업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하기야 로마 시내에도 아직 발굴 작업조차 착수하질 않아 그냥 천막으로 씌어 놓거나 철조망만 둘러쳐 놓은 곳이 적지 않긴 하지만, 이곳은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사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가 아니던가.
폼페이를 찾은 그날도 역시 폼페이 유적 한 켠에서 계속 발굴작업에 열중하는 조사원들과 대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더운 날씨였지만 인류 최고(最古)의 타임캡슐을 개봉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사명감 때문일까, 이들의 표정에서 피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나폴리 대학에서 나온 연구자들과 미국 미네소타에서 온 공동조사단이 발굴작업을 하고 있단다. 너무 광대한 지역이라 비용 문제도 있어 발굴 속도가 느릴 수도 있겠지만 완벽히 발굴을 하면 했지 날림으로 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철학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 순간 한국 고고학 사상 최대의 발견이라 할 공주 무령왕릉 발굴 조사를 단 하룻밤 새 끝마친 사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도시를 화산재로 덮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맞는 말이다. 다만 한마디 덧붙인다면,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화산재로 덮인 도시를 발굴 준비가 될 때까지 파헤치지 않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우리의 현실을 떠올릴 때면 으레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한편 오랜 기간에 걸친 폼페이 발굴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이곳 폼페이 현장뿐만 아니라 나폴리 시내 중심에 있는 국립고고학박물관을 찾아가 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승리를 그린 벽화나 각종 동상, 타일화 등 많은 수의 유물들이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져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유적은 어디까지나 제 위치에 이어야 제 매력을 발산하기에 폐허가 된 폼페이의 골목을 걸으며 느끼는 깊은 우수가 먼저이리란 생각엔 변함이 없다. 올 가을엔 폼페이의 우수를 가슴으로 느껴보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PC사랑'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