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다시 술렁이고 있다. 최근 일부 중도파 의원들의 탈당 논의는 노무현-정몽준 두 사람 사이의 후보단일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구당(救黨)파' 의원들은 여기에 이한동 전 총리까지 포함한 3자간의 후보단일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반(反)이회창 진영의 후보단일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12월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이번 대선에서 과연 이들 3자간의 후보단일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이들간의 후보단일화는 꼭 이루어져야 할 과제인가.
지금 민주당 내에서는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정몽준 두 사람 간의 후보단일화가 대선 승리를 위한 필수적 과제라는 공감대가 폭넓게 확산되어 있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주듯이, 두 사람이 제각기 출마했을 경우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앞으로 지지율이 높은 후보를 중심으로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후보단일화론을 의식해서인지, 최근의 여러 여론조사들에서는 노무현-정몽준 통합신당의 단일후보가 출마할 경우에 대한 예측조사 결과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여론조사상으로는 단일화의 일정한 시너지 효과도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3자 단일화론의 등장
그래서 민주당내 일부 중도파 의원들은 노무현-정몽준 두 사람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일단 민주당을 탈당하여 다른 정당을 만든 뒤, 노무현-정몽준 통합신당을 만들겠다는 탈당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주당을 깨자는 것이다. 자신들이 몸담은 민주당을 깨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들은 두 사람 사이의 후보단일화에 목을 매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최근 들어서는 이한동 전 총리까지 포함하는 3자 후보단일화론이 대두되고 있다. 한때 이한동 전 총리 영입을 통한 통합신당을 추진하던 민주당내 '구당(救黨)파' 의원들은 반(反)이회창 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서는 노무현-정몽준 두 사람 뿐 아니라, 이 전 총리까지 포함되는 3자단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기류의 변화를 읽어서인지, 한때 민주당 주도 신당 참여에 관심을 보이던 이 전 총리는 최근 다시 자신의 독자행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아마도 '백지신당'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일단 독자출마를 모색한 위에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한 뒤 후보단일화 협상에 나서려는 포석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같이 최근 들어 민주당 안팎의 후보단일화론은 단지 후보 조정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선정국 전반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후보단일화론은 대선 승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중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번 대선정국에서 후보단일화론이 어떠한 의미와 성격을 갖는 것인지에 대한 고려없이, 일단 이기고보자는 식의 맹목적 승부론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후보단일화론은 역대 선거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해왔다. 특히 과거 거대여당을 상대하기 위해 야당후보들간의 단일화 필요성은 빈번히 제기되었고, 지난 87년 대선에서 양김(김대중-김영삼) 단일화 요구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현재 제기되고 있는 2자 혹은 3자 단일화론은 양김의 후보단일화 문제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 사이에는 군정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공동의 과제가 있었다. 같은 목표를 지향하기에 당연히 함께 손잡았어야 할 두 사람이 찢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분열이라고 표현했고 후보단일화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이다.
공통점보다 차이가 더 큰 3명
그러나 지금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의원, 그리고 이한동 전 총리 사이에는 그같은 공통적 기반이 너무도 협소하다. 고작해야 정치의 변화라는, 대단히 추상적이며 수사적인 기치만이 공유될 뿐, 집권의 목표나 정치적 구상, 정책노선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공통점을 가진 것이 확인된 것이 없다.
세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고, 솔직히 말해 공통의 기반보다는 차이점이 더 커보인다. 한때 '서민후보'를 표방하던 노무현 후보과 '재벌후보'격인 정몽준 의원은 차라리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며, 과거 5-6공에 반대했던 노무현 후보와 5∼6공의 요직을 두루 지냈던 이한동 전 총리의 공통성을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세 사람 사이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아마 이회창 후보와 경쟁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 정도가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세 사람은 정체성이나 정치이념면에서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더 크게 발견되는 관계들이다. 그런데도 3자간의 단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후보단일화의 필요성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회창 후보를 이기기 위한 필요성이다. 반 이회창이라는 명제가 후보단일화론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이번 대선에서 반이회창이라는 명제는 과연 다른 모든 문제들을 젖혀버릴만큼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것인가. 이회창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잡고,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쉽게 말해 '이회창 후보에게 이겨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재벌 출신 정치인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자는 주장이 당연시되어도 좋은 것이냐' 하는 이야기이다.
무릇 정치세력간의 연대에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후보간의 단일화를 시도함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오직 권력만을 차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원칙조차 저버렸을 경우 그것은 '야합'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어 있다. 오직 대선 승리를 위해 무원칙하게 손잡은 DJP연합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우리는 이미 지켜 보지 않았던가. 지금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몽준 의원은 노무현 후보는 물론이고, 민주당의 정체성과도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는 정치인이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해온 민주당으로서는, 어쩌면 대척점에 서있는 정치인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가 앞으로 어떤 정치적 길을 가려하는지, 어떠한 정책노선을 내놓으려 하는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모든 문제들은 물을 필요조차 없이, 단지 지지율이 높으니까 손 잡아야 한다는 논리만이 횡행하고 있다. 이런 도박이 어디 있고, 이런 무책임한 정치가 어디있겠는가.
사실 정치 이념으로 치면야 정몽준 의원은 노무현 후보나 민주당과의 거리보다는 이회창 후보나 한나라당과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당 내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절대 안되고, 정몽준 의원은 자신들의 대통령 후보로 모시자는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이회창, 정몽준,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절대적 차이가 있길래 한 사람에게는 불가론이, 다른 한 사람에게는 추대론이 등장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민주당은 자존심도 없는가
물론 선거에서 지지율말고 무엇이 중요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것이 선거의 논리인지 모른다. 그러나 백번을 이해하면서 보려해도, 지지율 하나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팔아넘길 것만 같은 민주당의 모습은 정말 보기에 딱하다. 지금은 DJ정권의 부패비리로 얼룩져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민주당이지만, 그래도 과거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정당이었다.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임을 표방해왔던 정당이었다.
그러나 지금 '지지율'의 굴레에 갇혀, 군사권위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 재벌출신의 정치인에게 단일화를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을 지탱해왔던 자존심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묻지않을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포기하고 몸을 팔아서 정권을 다시 잡은 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라도 해서 정권을 다시 잡아야만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런 식의 사고라면 전두환·노태우씨라도 지지율만 높다면 후보로 내세우려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설혹 이긴들, 그렇게 들어선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대통령선거가 정치의 전부는 아니다. 이번 대통령선거와 함께 우리 정치가 끝이 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단일화가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설혹 그것이 실패하고 민주당이 야당을 해야 한다면 또 어떠한가. 민주당으로서야 듣기 싫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별수 없이 그렇게 된다면 그 때 가서 야당의 노릇 제대로 하면 되는 일이다.
그 야당을 가지고 좀더 개혁적인 정당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아무리 대선이 중요하다고 해도, 반이회창을 명분으로, 그동안 자신들이 표방해온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을 하루아침에 '재벌의 정당'으로 둔갑시키려는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대선은 12월로 끝나지만, 정당의 역사는 계속되는 것 아닌가.
최근 제기되고 있는 3자간의 후보단일화론은 본질적으로 97년 대선에서의 DJP연합론과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선거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권력을 위해서는 이념도 정책도 상관없이 손잡을 수 있다는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눈 앞의 선거에서는 승리했다고 하지만, 그 무원칙한 야합의 결과가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남겼는가를 우리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나마 DJP 연합론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연합이라는 명분이나마 있었다. 지금 3자 단일화론은 현실적으로 정몽준 의원으로의 단일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와도 크게 다르다. 결국 민주당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후보단일화 논리가 언제나 지고지선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상대를 이길 수만 있다면 다른 무엇을 따질 필요가 있겠느냐. 작금의 후보단일화론의 근본에는 바로 이같은 정치적 기회주의가 깔려있음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과연 무엇을 위한 후보단일화인가. 후보단일화를 외치기에 앞서 이 물음에 대한 답부터 내놓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