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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마이뉴스>에 실린 노무현씨의 반미발언(?)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또 난리들 치겠군"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와 그 밖의 몇몇 보수 언론에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물론 그 다음에 이어서 노무현씨가 한 해명, 그 발언에 뉘앙스를 준 부분들을, 이 신문들은 - 늘 그러하듯이 - 그냥 생략을 해 버렸다.

하긴 이 신문사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제한된 머리에 그 이상의 독해력을 요구하는 것은 곧 그들에 대한 정신적 고문이리라. 이 문제에 관해 아는 변호사로부터 법률 자문을 구해보았더니, 그들에게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는 것은 자칫 아동보호법 내지 동물학대법에 저축될 수 있다고 하니, 그냥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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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미주의자면 어떤가 ' 발언의 실상

어쨌든 대통령 되기 위해 미국이라는 유권자(?)의 표를 얻어야 할 것만 같은 이 빌어먹을 분위기 속에, 상쾌하게도 사학의 명문 고려대학교 영문과의 서지문 교수가 충격적인 주장을 하고 나서 파문이 일고 있다. 그의 주장인 즉, "다음 대통령 후보"는 "반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파격이 다른 신문도 아닌 조선일보의 지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서교수의 글은 첫 문장부터 나를 감동시켰다.

"다음 대통령이 이지적이고 냉철한 반미주의자라면 자신의 반미(反美)성향을 지렛대로 이용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와 실리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 문장)

외교의 상대국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양보와 실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대통령의 고유한 임무이리라. 그리하여 나는 "다음 대통령이" "자신의 반미성향을 지렛대로 이용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와 실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지적이고 냉철한 반미주의자"이기를 바라는 그의 갸륵한 마음에 그만 100%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 더 귀한 것은 이 황금 같은 주장이 바로 조선일보에 실렸다는 것. 생각해 보라.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인가. 미제라면 대통령 후보의 연설까지 테이프로 만들어돌리던 신문 아닌가. 바로 그런 친미 일변도의 신문에 반미의 주장이 실렸으니, 역사적으로 기념할 만한 사건이 아니겠는가?

물론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몰고 오는 것은 아니다. 또 외부 필자가 신문사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명시적인 반미주의 선언을 담고 있는 글이 데스크에서 반려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실렸다는 것은 분명히 특기할 만하다. 혹시 조선일보도 이제 철이 들어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신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 17일자 조선일보 A7면에 실린 서지문 교수의 '시론'
2.

물론 서지문 교수의 주장에는 사소한 문제가 없지 않다. 가령 "전투적이고 감정적인 반미주의자가 대통령이 되어 사사건건 미국을 배격하고 마찰을 일으켜 우리나라의 안보가 위태로워지고 국가경제에 파탄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은 우리 국민 중에는 없으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하며, 노무현 후보를 물고 늘어지는 것.

이 쓸데 없는 사족 때문에 최초의 반미주의 선언이라는 지대한 의의를 가진 그 역사적인 글이 고작 한나라당을 위한 대선용 앙가주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다. 특히 글의 마지막 문장은 더욱 더 그렇다.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까지 되고서 선거를 포기한다고 해서 정치인으로서 어리석거나 부끄러운 일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마지막 문장)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일각에서는 오해를 할 수가 있다. 즉 이 정도 수위의 발언이라면 서지문 교수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위해 노골적으로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사퇴할 것을 권고하는 뻔뻔한 정치교수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그 밖에도 글 전체의 주제의식에 비해 노무현 후보에 대한 비방과 험담이 너무 많다는 느낌이다. 더구나 그 비방과 험담에는 "의심"이라는 주관적 요인 이외에 이렇다할 근거가 없다. 그런 부분은 독자로 하여금 과연 저 정도의 논리로 과연 교수생활 온전히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할지도 모르겠다. 서교수의 자질에 "의심"을 품은 독자는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명문대의 영문과 교수로 선출까지 되고서 교수직을 포기한다고 해서 학자로서 어리석거나 부끄러운 일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3.

이 사소한 문제 때문에 서지문 교수가 무슨 한나라당의 나팔수라도 되는 양, 이 고려대 영문과 교수님이 한나라당을 위해 사전낙선운동이라도 하는 양,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목욕물을 버리다가 애까지 버릴 수는 없는 일. 이런 사소한 문제를 걸어 서교수의 건전한 문제의식까지 도매금으로 매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서지문 교수에 대한 세간의 오해는 그 글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다. 서교수의 글은 미괄식이 아니라 두괄식이다. 모두 알다시피 '두괄식'이란 주제문이 글의 첫머리에 제시되는 글쓰기의 형식을 일컫는다. 글의 주제문은 바로 앞머리에 제시되어 있다. 글의 중간은 완성도가 상당히 떨어지고, 글의 마지막은 불필요한 사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글 전체의 주제문은 바로 글머리에 위치한다. 바로 거기에서 그는 조선일보 사상 최초로 명시적인 반미주의 선언을 하고 있다. 이 얼마나 파격적이며 충격적이며 획기적인 일인가. 내가 그 글의 첫 부분을 접했을 때 느꼈던 그 참신함을 다시 나누고 싶어, 그 글의 주제문을 다시 인용하면서 글을 맺기로 한다.

"다음 대통령이 이지적이고 냉철한 반미주의자라면 자신의 반미(反美)성향을 지렛대로 이용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와 실리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부디 이회창이든 노무현이든, "다음 대통령"은 "이지적이고 냉철한 반미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반미 성향을 지렛대로 이용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와 실리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서지문 교수와 함께 간절히 빌어본다.

덧붙이는 글 | [시론] 한국 대통령후보의 '反美'

다음 대통령이 이지적이고 냉철한 반미주의자라면 자신의 반미(反美)성향을 지렛대로 이용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와 실리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투적이고 감정적인 반미주의자가 대통령이 되어 사사건건 미국을 배격하고 마찰을 일으켜 우리나라의 안보가 위태로워지고 국가경제에 파탄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은 우리 국민 중에는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최근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후보가 자신을 “미국에 안 갔다고 해서 반미주의자는 아니다”라고 했다가 “반미주의자면 또 어떤가”라고 해 물의가 일고 있다. 반미주의자라는 것 자체는 대통령 후보로서 결격사유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미국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고, 미국과의 관계에 국운마저 크게 좌우되는 나라에서, 대통령 후보는 반미주의자이건 친미주의자이건 그의 미국관의 뿌리와, 그가 한·미 양국 간의 미래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할 구상을 하고 있는지를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 후보의 반미성향이 우려되는 것은 그것이 친미적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긴 역사적 관계, 그리고 양국 국민 간의 역사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과 피상적인 관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역사적 관계를 생각할 때 미국의 여러 차례의 중대한 정책적 실수와 자국 편의적 제반 조처, 힘의 우위를 이용한 불공평한 압력 등 따지고 극복해야 할 문제는 많다. 그러나 또한 구한말(舊韓末)부터 오늘날까지 미국과 미국 국민에게서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지대한 혜택을 무시한다면 올바른 국가적 처신도 아니고 외교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재정립하면서 우리의 안전을 확보하고 실리를 유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미정책 결정의 수장(首長)이 될 대통령에게는 특히 균형감각과 발전적 관계구축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개인적 경험과 성향에 기인한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노 후보가 깊은 반미감정을 갖고 있다 해도 그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반미주의라 한들 어떠냐”는 식의 태도는 대통령 후보로서는 너무나 무책임하다. 

사실은 대미관(對美觀)뿐 아니라 대북관(對北觀) 등 여러 정치적 견해가 투박하게 감정적인 것이 노 후보의 결함이고 약점이 아닌가 한다. 지난 2월에는 공공연히 말했는데 이제는 고백하기 몹시 꺼려지는 고백을 하자면 나도 노 후보에게 지대한 호감을 가졌었다. 그가 우리 근세 정치사에 드문 ‘큰그릇’이면서 소박한 민중의 정치가라고 생각되어 그의 출현을 크게 환영했었다. 

그러나 노 후보는 ‘대통령 후보’라는 영광과 부담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가 대통령이 된다는 가정이 많은 사람을 근심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크나 큰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가 더 공부를 하고 모든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기간을 더 가졌더라면, 즉 그의 정치적 자산이 좀 더 컸더라면 그는 정말 큰 인물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는 경륜과 식견을 충분히 쌓기 전에 대통령 후보에 오름으로써 지극히 부족한 자산(資産)을 갖고 자신의 정치적 생애를 경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꼭 미국을 가 보아야 미국을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을 가 본다면 미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노 후보가 미국에도 가보고 한·미 교류사에 대해 여러모로 연구도 해 보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현실, 세계사와 국제관계, 그리고 인간 심리를 깊이 연구할 충분한 기간을 가진 후에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했으면 한다. 그가 이대로 대통령 선거를 치러서 그의 미숙함을 낱낱이 노출시켜 국민이 기피하는 정치인이 되어버린다면 그의 개인적인 불행이고 국가적인 큰 손실이다.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까지 되고서 선거를 포기한다고 해서 정치인으로서 어리석거나 부끄러운 일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서지문/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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