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의 이목을 평양으로 집중시켰던 북일 정상회담이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 공동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성공리에 끝났다. 특히 최대 관심사였던 일본인 납치 의혹과 관련해 김정일 위원장이 이를 시인하고 사과 및 재발 방지 약속을 함으로써, 무겁게만 보였던 고이즈미 총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북한측의 이러한 전향적인 입장에 화답하듯, 일본 쪽은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해 "조선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과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보상 문제는 1954년 이전의 재산청구권을 상호 포기하고 일본이 국교정상화 이후 무상자금협력, 저금리 장기차관 공여, 국제기관을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을 통한 경제협력을 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규모와 내용은 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협의하기로 했다.
또한 한반도 문제의 최대 현안으로 부각되어온 핵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북한은 미사일 발사실험 중지를 2003년 이후에도 무기한으로 연장하기로 했고, 핵 문제에 대해서는 관련한 모든 국제조약을 준수하기로 했다.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 의사도 밝히고 일본 쪽에 그 뜻을 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로써 길게는 일제의 식민지배 시대부터 '비정상적'이었던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가 비로소 정상화되는 길을 밟아나갈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와 동북아 냉전의 하나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함으로써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큰 진전을 이뤄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동안 거론조차 못하게 했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사죄와 재발방지 약속을 한 것은 북일관계 정상화에 대한 북한측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북일수교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두 정상이 한일 기본협정과 같은 경제협력 방식으로 채택하기로 한 것은 '역사바로세우기' 관점에서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북한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는 외교노선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 납치 문제는 '양날의 칼'
북-일 정상회담에서 가장 주목을 끈 부분은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와 재발 방지 약속을 하는 '용단'을 내렸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큰 결단'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북일관계의 발목을 잡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북한이 정상회담 직후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납치된 일본인을 돌려보낼 의사가 있다가 밝힌 것은 사실상 북한 정부가 일본측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이 납치 사실을 인정한 것은 그 동안 의혹으로만 제기되어온 납치 문제가 사실로 판명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 내의 반북 감정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특히 납치된 일본인 가운데 8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유가족들은 물론 일본 전체가 충격에 휩싸이고 있다.
벌써부터 일본 정치권 일부와 언론이 북한측의 납치 시인을 '국가범죄'로 몰고가면서 북한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국제법적으로도 북한 정부가 책임을 피하기 힘들기 때문에, 일본 유가족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일본 내의 분위기는 북한은 물론 일본 정부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일본 정부는 격앙된 여론을 달래지 못할 경우, 10월부터 재개하기로 한 수교 협상이 일본 '안'으로부터 발목이 잡힐 수 있다. 또한 북한으로서도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까지 했는데, 북-일 수교 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결국 북한이 납치 문제와 관련해 '씻김굿'을 한다는 자세로, 일본 여론이 요구하는 것들 가운데, 실현 가능한 부분들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망자들의 사망 원인에 대한 납득할 만한 해명, 생존자들의 조속한 송환 등은 일본 내의 강경 여론을 달랠 수 있는 조치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도 이러한 조치들은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격동하는 한반도 국제정치
이번 북-일 정상회담이 한반도 국제정치에서 큰 의미를 갖는 부분은 지금까지 미국의 2선에서 대북외교를 펼쳐온 일본이 '독자 외교'를 감행했다는 점이다. 이는 남북관계에 이어 북일관계에서도 적대 관계의 청산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남은 것은 한반도 냉전구조의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북미관계이다.
북미관계의 진전없는 남북, 북일관계의 개선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미국이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에 동참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과 일본의 독자 외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특히 한반도 냉전구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안보문제에 접근할수록 미국의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역할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북일 정상회담이 북미관계와 한-미-일 삼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유심히볼 필요가 있다. 일단 북한은 미국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자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남북관계가 정상화되고 있고, 북일관계도 급진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북한 외교의 초점은 미국에 맞춰질 공산이 크다.
일단 북한은 미사일 발사실험 유예를 2003년 이후에도 계속하고 핵 문제와 관련해 국제합의를 준수하기로 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의 최대 현안인 핵, 미사일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 의지를 재차 밝혀 놓고 있다.
즉, 북한은 경수로 사업 지연에 따른 전력 손실 보상과 미사일 수출 및 개발 포기에 따른 경제적, 안보적 우려를 미국이 해소해주면 기꺼이 미국에 협력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악행을 보상할 수 없다'며 사실상 북한의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어 양측의 입장 차이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핵, 미사일 문제의 완전한 해결없이 북일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북일 정상회담 이전부터 간접적이지만 강하게 나타내왔다. 이는 곧 북일간의 국교정상화 교섭이 미국으로부터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북한의 파격적인 양보 가능성이다. 최근 북한의 외교 행보를 보면, 남한과 일본측이 요구해온 사안들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실리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북한이 그 동안 '주권 사항'이라며 대미 억지력 차원에서 추구해온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시험발사 유예를 2003년 이후에도 유지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러한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북한의 입장에서 핵, 미사일 문제는 단순히 명분 차원이 아니라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으로부터 적절한 보상과 체제안전보장, 그리고 관계 정상화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핵과 미사일이라는 유력한 협상 카드를 포기하는 것은 '통큰 결단'을 넘어선 수준인 것이다.
핵과 미사일 등 군사력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마지노선을 그어온 부분은 '주고받기식' 협상이다. 또한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경우에, 유력한 협상 카드가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미국측이 또 다른 전제조건, 즉 생화학무기와 재래식 군사력, 그리고 인권 문제 등을 들고나올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사안별 협상이 아닌 포괄적인 협상을 추구해오고 있다. 즉, 핵 미사일, 생화학무기, 재래식 군사력, 인권 문제 등과 관련해 눈에 띠는 북한의 전향적인 조치가 없을 경우 강경노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풀리지 않는 책임을 북한에게 돌리고, 북한의 양보시 미국이 지불해야 할 반대급부를 최대한 줄이며, 북한위협론을 최대한 활용해 정치군사적인 이익을 챙기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차원의 한미일 공조체계 모색해야
여러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증진시킬 호기를 맞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남북한의 합의 사항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고 있고, 북일관계도 정상화의 궤도에 올라서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북한이 내부적으로는 경제개선조치를 단행하고 외부적으로는 적극적인 평화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미지도 크게 제고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하게 바라볼 문제가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 미국, 일본의 국내 문제가 북한과의 관계에 미치는 파장이다. 즉, 한반도 냉전 구조는 국가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 내부에도 있다는 것이고,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가 본격화될 경우에 냉전세력간의 반발도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고, 잘 알려진 것처럼 유력한 대통령 후보자는 대북강경 성향이다. 무엇보다도 이회창 후보의 정치적 기반은 전통적인 반공·반북·반DJ, 그리고 친미 세력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정권 교체 여부는 향후 한반도 정세의 핵심적인 변수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일본의 국내 사정 역시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일관계 정상화에 결코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미국의 국내 정치 역시 그 어느 때보다 40여년 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사에서 경고했던 군산복합체의 막강한 영향력하에 있다. 국가간의 화해와 협력이 국가들 내부의 이해관계와 미묘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한반도 정세의 현실이자 미래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다른 나라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나라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대선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유권자의 선택이 역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한 가지 이제 다른 차원의 한미일 공조체계를 모색해야 할 때라는 점이다. 미국과 보조를 맞추지 않은 남한과 일본의 전진은 미국과 국내 냉전세력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양국 정부 모두에게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해오고 있다.
그러나 발상을 전환해, 남한과 일본의 지속적인 대북화해협력 정책이 미국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대북 강경 노선을 고집할 경우 동북아에서 '왕따'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미국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북한과의 지속적인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동북아의 또 다른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지지해오고 있다. 북한은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관계 개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유리한 환경을 등에 업고 남한과 일본이 이번에는 미국에게 당당히 요구할 때이다. 주저하지 말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의 장에 동참해달라고, 동참하지 않으면 우리끼리라도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