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요즘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대략 세 가지에 동의한다. 첫째, 숨가쁘게 달려온 지금까지와 달리 현재는 어떤 여론조사를 해도 큰 변화가 없다. 둘째, 2강(이회창·정몽준)-1중(노무현) 구도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추석 직후 형성되는 여론이 대선 D-100일 레이스 초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 본 민심은 '불안한 균형점'이다. 지난 6월 중순 이후 정몽준 의원의 급부상으로 형성된 이회창-노무현-정몽준 3자구도는 7월 중순 들어 정몽준 의원이 노무현 후보를 꺾고 2위에 올라서면서 2강-1중 구도를 형성했다. 8월말부터 몇몇 조사에서 정 의원이 이회창 후보를 근소하게 앞서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 3자 대결에서 정 의원이 이 후보까지 앞섰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이런 상황이 약 두 달간 지속되고 있다.
이-노-정, 3인의 불안한 균형점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지금이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이회창 후보는 현재 1위를 달리고 있지만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한때 50%대까지 근접했던 이 후보는 3자구도가 형성되고 병역비리 의혹이 거세지면서, 시기적으로는 8월에 접어들면서, 지지도가 약 30%까지 떨어졌다.
이 후보에게 지지도 30%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여론조사를 볼 때 한나라당의 평균 지지도가 30% 내외. 만약 이 후보가 여기서 더 빠진다면 한나라당 핵심 지지층이 이 후보로부터 이탈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후보로서는 현재 바닥까지 왔다는 뜻이다.
노무현 후보는 상황이 더 안좋다. 노 후보는 이-노 양자 대결구도에서는 6월 중순부터 이 후보에게 뒤지기 시작했고, 이-노-정 3자 대결구도에서는 그보다 빠른 6월 초순부터 이 후보에게 선두를 빼앗긴 뒤 7월 중순부터는 그나마 2위 자리도 정 후보에게 빼앗겨 3위로 내려앉았다. 급기야 8월 들어서는 지지율 20% 초반까지 떨어졌다.
한때 60%대까지 근접했던 화려했던 '노풍'은 이제 호남에서만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지난 9월 7일∼9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지역별로 노 후보는 호남권에서만 56.0%의 지지율로 1위를 기록했을 뿐 나머지 지역에서는 모두 이 후보·정 의원에게 뒤진 3위였다. 연령별로도 핵심 지지층이었던 20·30대가 모두 정 의원에게 돌아섰다. 현재 노 후보의 지지도를 떠받치고 있는 마지막 보루는 지역적으로는 호남, 정당으로는 민주당 핵심 지지층이다. 그야말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여기서 더 빠진다면? 역시 민주당 핵심 지지층마저 노 후보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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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의원은 세 명중 가장 만족스러운 상황이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5월까지 불과 10%대였던 지지율은 8월초 30%까지 급상승했으나 그후로 정체 상태다.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거품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르게 표현하면 더 이상 추가상승 동력이 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정 의원이야말로 지금이 중요한 시점이다. 최고점인가 아니면 여전히 상승중인가. 최고점이라면 곧 하강할 것인가 아니면 유지할 것인가. 만약 여기서 빠지면 일순간의 거품이 되는 것이고, 더 오르면 거품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노풍과 정풍의 차이
대선을 앞둔 올해 민심의 가장 큰 특징은 '바람'이다. 연초에는 '노풍(盧風)'이 불더니 이제는 '정풍(鄭風)'이 불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풍과 정풍은 차이가 있다. 국민경선제라는 정치개혁방안을 계기로 지난 3월부터 불기 시작했던 노풍은 세대별로 볼 때 30대가 중심이었다. 30대가 먼저 노 후보를 지지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20대와 40대, 심지어 50대까지 끌어올리는 형태를 띄었다.
반면 월드컵 4강 신화라는 전국민적 축제를 계기로 6월 중순부터 불기 시작한 정풍은 30대보다는 40대가 중심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TNS(Tayor Nelson Sofres)의 조사에 의하면 이-노-정 삼자 구도에서 정 의원의 40대 지지도는 5월 14일 14.3%, 6월 13일 23.7%, 7월 16일 30.7%, 8월 10일 33.0% 등 가장 먼저 그리고 적극적으로 상승했다. 정 의원의 지지도는 40대가 활발히 움직이면서 30대와 20대를 추동하는 양상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노풍은 확실한 근거지가 있는 바람이었다. 노풍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된 것도 3월 16일 광주경선이었고, 노풍이 잦아든 지금 노 후보가 그나마 우위를 달리고 있는 지역도 호남이다. 하지만 정풍은 노풍과 같은 확실한 지역적 근거지를 찾기가 힘들다. 굳이 강세지역을 꼽는다면 인천·경기, 서울, 대전·충청 등 중부 이북지방이라고 할 수 있지만 노 후보나 이 후보의 확연한 지역적 특성과 동등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노풍은 특정지역·특정정당을 중심으로 세대·계층을 하루아침에 모두 흡입하는 특성을 보였지만 정풍은 그런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 노풍이 한때 60%에 근접하는 폭발성을 보인 반면 정풍이 최대 30% 중반을 보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정풍은 거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노풍처럼 쉽게 꺾이기 힘들 수도 있다. 실체가 없던가 아니면 약점이 없던가이다.
영남과 호남의 민심
재미있는 것은 영남과 호남의 민심이다. 아직까지 호남의 민심은 노 후보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9월 7일∼9일 한길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호남권 지지율은 노 후보가 56.0%로 독보적이다. 하지만 정 의원 32.6%, 이 후보 5.7%로 정 의원의 지지율 또한 만만치 않게 상승했다. TNS의 조사에서도 지난 5월 14일 호남권 지지율은 노 후보 75.9%, 이 후보 9.0%, 정 의원 6.8%였는데 3개월 후인 8월 10일에는 노 후보 41.4%, 정 의원 32.7%, 이 후보 10.4%로 정 후보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호남의 민심에 대해 '누구든지 이회창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을 민다'로 진단하고 있다.
반면 영남의 민심은 '누구든지 이회창에게 도전하면 견제한다'로 보인다. TNS 조사에 의하면 아직 정풍이 불기 전인 5월 14일 정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울산 동구)가 있는 PK 지역에서 15.1%로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였으나, 정풍이 한창인 8월 10일 조사에서는 고작 1.4% 상승한 16.5%로 제일 낮았다. 다른 지역이 평균 20∼30% 씩 지지율이 상승하고 울산이 정 의원의 정치 근거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결과다.
또 병역비리 수사가 본격화된 7월 이후 PK지역의 이 후보 지지율은 40% 후반에서 50% 전반으로 오히려 상승했다(5월 14일 48.9%, 6월 13일 41.2%, 7월 16일 53.5%, 8월 10일 56.4% : TNS 조사). 영남의 민심은 병풍을 맞아 이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이회창 대항마'를 견제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견고한 이회창 지지층
이렇게 영남이라는 거대한 텃밭이 있고 또 단결하고 있는 이상 이 후보의 지지율은 상당히 견고할 수밖에 없다. 이 후보 지지율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적으로 등락폭이 적다는 점이다. 노풍이 잦아들기 시작한 지난 5월 이후 이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최하 29.2%(8월 31일 MBC/코리아리서치), 최상 40.2%(6월 15∼16일 중앙일보 자체조사)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위 그래프 참고). 보통 30%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수치는 이 후보의 지지율이 개인 지지보다는 한나라당이라는 거대 정당의 지지가 떠받치고 있다는 분석에 설득력을 갖게 한다.
이 후보 지지율의 또 한가지 특징은 연령별로 볼 때 50대 이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50대 이상의 이 후보 지지율은 거의 모두 50%를 넘는다. 반면 노 후보와 정 의원은 3자 대결 구도에서 10%대를 넘기가 거의 힘든 상황이다. 50대 이상이 꼭 투표에 참여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후보로서는 든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이 후보는 자기 지지층의 변화보다는 상대 후보의 지지층과 부동층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중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 후보로서는 지지율이 좀처럼 하락하지도 않지만 좀처럼 상승하지도 않는 것이 고민이다. 6·13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해도, 연이어 8·8 재보선에서 압승을 해도 이 후보의 지지율은 좀처럼 큰 폭으로 상승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꾸 '바람'이 분다. 올해 9개월이라는 기간동안 벌써 '노풍'과 '정풍', 두 개의 바람이 불었다.
왜 자꾸 바람이 부는가.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대선 주자들의 지지층이 과거 3김처럼 두텁고 견고하지 않다는 점, 둘째는 국민들의 변화에 대한 욕구가 넓게 형성됐다는 점이다. TNS 김헌태 본부장은 "현재 대선주자들은 과거 3김씨와 같이 넓고 확고한 자신의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서 "그만큼 지지가 하루아침에 빠질 수도 있고 급속히 붙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폴앤폴(poll & poll)의 조용휴 대표는 "한번은 설문조사에서 예상되는 선거이슈를 물은 적이 있는데 '정권교체'라는 응답이 30%대인 반면 '구(舊)정치 일소'라는 응답이 60%를 넘었다"고 말했다. 확실한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광범위한 '정치적 유랑층'이 있고 이들은 '변화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람 일으키는 광범위한 '정치적 유랑층'
광범위한 정치적 유랑층이 자꾸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2002년 대선,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번 추석을 하나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TNS 김헌태 본부장은 "지금부터 어떤 식으로 여론이 변하느냐가 향후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추석이 굉장히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거칠게 보면 이렇다. 정몽준 의원이 (지지도가) 떨어지면 상대적으로 노무현 후보에게 유리하고, 노무현 후보가 떨어지면 민주당에서조차 '정몽준 불가피론'으로 갈 수 있고, 이회창 후보가 떨어지면 한나라당 내부 동요가 일어날 수 있다."
한길리서치의 홍형식 소장은 "추석 이후 여론조사를 발표할 수 있는 시기는 불과 두 달 밖에 남지 않는다"면서 "추석 직후 발표되는 여론조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때 나타나는 경향이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근거로 각 진영에서 전략적 판단을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 의원이 계속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추석 이후 지지도가 상승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유지는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석은 일종에 대규모 국민적 커뮤니케이션 기간이다. 자, 당신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친지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는가. 정치권은 그 민심이 반영된 9월 넷째 주 여론조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