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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존층이 지구의 생명싸개라면 사람의 몸은 생명을 감싸안은 생명싸개라 함이 어떨까.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을 잘 가리고 보호하는 싸개가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이 옷이다. 옷은 내 몸을 감싸주고 내 품위를 지켜주는 것이니 여간 고맙지 아니한가?
그런데 그 옷은 새 옷이 금방 유행이 바뀌고 낡아지고 떨어진다. 나는 유행과 멋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 유행이 큰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다. 가령 나는 몇 십 년이 된 옷이나 양복도 떨어지지 않으면 계속 입고 다닌다. 요즈음 사람들은 멀쩡한 옷도 버리기를 잘하는 것을 많이 본다. 아마 우리나라처럼 옷이 흔한 나라가 있을까 싶다.
옛사람들은 가난한 것을 못 먹고 헐벗는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은 누구든지 잘 먹고 잘 입는다. 돌이켜 보면 내 어린 시절은 그렇지 아니했던 것 같다. 6.25 사변의 전쟁으로 더욱 그러했으리라.
내가 갓난아기 시절에 입던 배내 저고리를 내 어머니가 보여주신 기억이 난다. 얼마나 귀엽고 앙증스러운 옷이었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내 어머니가 아래위로 단정하게 보이는 까만 옷을 입혀 주셨는데 동네 부녀들이 "꼭 학생 같다"고 칭찬해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단체관람 외에 극장 구경을 하면 처벌한다고 선생님들이 주의를 주고 단속을 했는데, 사실 그때는 별반 다른 옷도 없고 해서 그랬겠지만 어엿이 교복차림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이따금씩 영화도 보고 서커스나 쇼 공연을 보러 다닌 기억이 있다.
워낙 당당한 탓이었는지 한 번도 생활지도 선생님에게 붙잡혀서 혼난 기억은 없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오히려 어느 날 참 이상한 일 한 가지가 있었으니 내가 다니던 교회에 담임 목사님이 내가 다니던 학교의 교장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교회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모범적이라고 칭찬하셨다면서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갔지만 모두 교복과 얽힌 재미있는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맞춤복을 지은 것은 태권도 도복이었는데 어머니가 나쁜 친구들을 사귄다고 염려하셔서 체육관에 계속 나가서 운동하는 것을 반대하시어 그만 맞춘 도복을 찾지 못했던 것이 오늘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아쉬운 추억이다.
내가 처음 양복을 입게 된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지방 학교에 진학한 지 얼마 안 돼서 시내의 서울나사 양복점에서 제일 모직의 '골덴텍스' 감으로 된 짙은 녹색바탕에 잔잔한 금박이 놓여 있는 화려한 색깔의 양복이다. 어머니가 옷을 넉넉하게 해 달라고 지나치게 양복점에 부탁 부탁하여 너무 헐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대학에 한창 다닐 때는 좋은 옷이 없어서 기숙사의 P선배가 외출했을 때 P선배의 옷을 몰래 빌려 입고 명절에는 김천에서 대구시내까지 외출을 하면서 나름대로 멋을 내고 품위를 지키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선배하고는 가까이 지내지 못해 지금까지 그 사실을 실토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공중 앞에서 가르친다는 직업의 특성상 싫건 좋건 주로 양복차림으로 입고 생활한 지가 여지껏 삼십여 년이 된다.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74년 11월 결혼할 때 아내가 맞추어준 양복은 종로에서 맞춘 것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좀 작아지기는 하였지만 전혀 구김이 가지 않아 20년을 입었다. 그런데 우연히 찾아온 출소자가 입을 양복을 달라고 말하기에 그냥 선물을 하고 말았던 일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로서는 내 인생에 네 번째 양복을 맞추게 된 일이 생겼다. 결혼 후로는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임직식을 기념하여 교우들이 맞추어준 것이었다. 20몇년만에 양복을 맞추게 된 동기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고 여겨진다.
군 제대 후 복학하여 아직도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녀석이 결혼할 배필이 확정되자, 직장과 살림 집을 자신이 마련했다. 아들의 결혼식이 가까워오자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사람 보기에 허름하게 보일 구겨진 양복을 입고 나가기가 미안해서 양복을 맞추게 되었다.
물론 요즈음 기성복도 좋은 것이 많이 있지만 값이 비싸고 그렇다고 싼 것이 있지만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아내와 며느리와 함께 한 참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태리'라고 하는 맞춤양복점을 발견하였는데, 우선 내가 여행하고 돌아온 나라 중에 한 나라로서 이국적인 느낌이 들어 좋아서 들어갔다.
이것저것 골라보고 물어보니 최하가 16만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좀 좋은 옷감의 양복은 훨씬 비쌋다. 양복감의 색상과 두께가 내게 흡족하지는 않아서 망설이다가 아내가 그런 대로 입을 만한 옷감을 권해 그것으로 양복을 맞추게 되었다.
그때 딸에게서 전화가 와서 아내가 바꾸어주었다.
"아빠 어디세요. 나 오빠랑 가는 길인데 어디세요?"
"나 양복을 맞추러 들어 와 있어. 지금 보고 있는 중이야!"
"아빠 양복이 얼마래요?"
"그래, 아빠 양복은 싼 것으로 맞추려 하고 있어"
"양복 값은 얼만데요. 양복 값은 얼마냐니까요?"
"양복 값은 16만원인데 나 돈 있어."
"좀 좋은 양복을 맞추시지 그래요. 나 지금 돈 가지고 가는데"
"아니야 돈주지마! 됐어 나 돈 있어 16만 짜리인데 뭐!"
통화를 끝내고 아내가 권하던 옷감으로 양복을 맞추고 상쾌한 기분으로 아들 집으로 돌아 왔다. 아내에게 "딸이 양복 값이 얼마냐고 자꾸 묻는구만"이라고 말하니, 아내는 "양복 값을 줄려는가본데, 딸의 효를 받으시지요. 딸이 복 받겠지요"하고 은근히 권하는 투였다.
한참 후에 딸과 아들이 직장에서 돌아왔다. 딸은 다니던 직장이 너무 힘이 들어 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딸은 흰 봉투에 20만원을 넣어서 내게 주면서 엄마의 신발 값도 함께 들어 있다고 하였다. 돌이켜 보면 두 자녀의 행동이 그지없이 대견스럽다. 아들녀석은 얼마나 자립심이 강한지 대학졸업도 안 했는데 벌써 어엿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부부는 넉넉하지 못한 사정에 특별히 자녀들에게 잘해준 것 없으나 이들이 이렇게 사회에 성인이 되어 자기 앞 처세를 하고 다니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가 부모로서 보여준 것이 있다면 절약하며 살아온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아들의 결혼식도 양가가 합해서 모두 3백만원 선에서 진행하기로 하고 일절 혼수는 서로간에 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어찌 쉬운 일일까만 최대한 지혜를 짜내어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16만원에 맞춘 내 양복은 의미를 추가하게 되는 것으로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현대는 너무 극심한 물질주의 우상에 혈안이 되어 영혼마저 상실해가는 세상이 아니던가. 우리는 물질문명보다는 정신문명의 가치를 더욱 인정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일깨우는 일에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대오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 우리만이라도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자.
부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다. 바르게 살고 선한 뜻으로 사는 인생이 행복한 삶이고 성공적인 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행복이 있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이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시인이며 집필가로서, 태안문학회원이며 문예한국 신인상에 입상하였으며, 농어촌문화에 적응하여 현재 안면도에서 8년째 살고 있음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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