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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억달러 대북 지원설을 폭로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
4억달러 대북 지원설을 폭로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나라당이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현대를 통해 북한에 4억달러를 비밀 지원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권이 돈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샀다"며, 김대중 정부의 퇴진까지 요구하고 있고 청와대와 민주당은 이를 부인하면서 한나라당의 무책임한 정치 공세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산업은행으로부터 4900억원(4억달러)를 긴급대출 받아 '의혹'의 몸통으로 지목된 현대상선은 대출받은 돈의 사용처를 공개하면서, 한나라당의 주장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상선은 의혹이 계속될 경우 회계장부까지 공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고 있기도 하다.

대선을 불과 3개월 앞두고 메가톤급 폭탄이 터진 것이다. 병역비리공방으로 수세에 몰린 한나라당은 이를 반전시킬 호재로 삼고 있다. 특히 이 문제를 계속 부각시킴으로써, 대권의 두 가지 큰 걸림돌인 '햇볕정책'과 '정몽준 후보'를 동시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4억달러 북한 지원설'은 대선뿐만 아니라 격동하고 있는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당장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가 공언한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됐다. 또한 임기말 한반도 정세 호전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 추진력도 떨어뜨릴 것으로 보인다.

@REL1@
많은 사람들은 "왜 한반도 정세가 한참 좋아지고 있을 때, 이런 의혹이 터졌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의혹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 못지 않게, 이 문제를 터뜨린 세력의 실체와 의도를 파악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

4억달러 지원설의 배후는 미 CIA와 주한미군

26일 정무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현대 관계자들.
26일 정무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현대 관계자들. ⓒ 오마이뉴스 권우성
4억달러 대북 비밀 지원설을 터뜨린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증거로 내세운 것은 미국의 의회조사국(CRS) 래리 닉쉬 연구원이 지난 3월에 작성한 '한미관계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이미 임동원 특사의 평양 방문 직전에 공개된 바 있고,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은 이 보고서에 근거해 '금강산 관광 대금의 군사비 전용' 의혹을 강력히 제기한 바 있다.

엄호성 의원은 9월 25일 국정감사에서 "이 보고서는 (부시) 행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와 자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 의회의 정책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료로 그만큼 신뢰도가 높은 자료"라며 자신의 주장의 신빙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보고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래리 닉쉬가 2002년 3월 5일 작성하고 25일에 공개한 '한미관계 보고서'는 미국의 한반도에서의 이해관계, 북한의 핵, 미사일, 재래식 무기 문제,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에 대한 한미간의 이견, 햇볕정책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반응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바로 부시 행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반응이다.

"부시 행정부는 햇볕정책의 다른 요소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부시 행정부와 김대중 정부는 미국의 테러지원국 목록에 북한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주한미군 사령부와 중앙정보국(CIA)은 북한이 1998년 이후 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을 관장하는 대가로 지불한 4억 달러 이상의 돈 가운데 상당 부분을 군사적 목적을 위해 쓰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현대는 비밀 자금을 북한에 제공했고, 이에 따라 현대가 북한에 준 돈의 총액은 8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보도에 따르면 CIA는 2001년 2월 이러한 의혹을 담은 비망록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햇볕정책의 하이라이트로 찬양해왔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는 이 사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재정적으로 곤란에 빠진 현대에 큰 손실을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보고서가 발표되자 현대와 외교통상부는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따라 보고서 내용도 일부 수정이 되었다.

<조선일보>측과 한나라당은 괄호로 처리된 부분, 즉 닉쉬 연구원이 정보 소식통을 인용해 현대가 북한에 추가적으로 4억달러 규모의 비밀 지원을 했다는 부분에 주목하고, 조선일보는 <월간조선> 5월호를 통해, 한나라당은 9월 국정감사에서 이를 터뜨린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 의혹의 최초 정보원으로 닉쉬는 주한미군 사령부와 CIA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주한미군 사령부와 CIA가 '북한의 금강산 관광대금의 군사비 전용 의혹'과 '4억달러 비밀 대북지원설'을 입수하고 이를 닉쉬 연구원에게 흘린 것이다. <월간조선>과 한나라당이 '한미관계 보고서'와 관련해 언급한 "행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와 자체 수집한 정보"는 바로 주한미군 사령부와 CIA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의도는 무엇인가?

엄호성 의원의 질의에 대해 답변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
엄호성 의원의 질의에 대해 답변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필자는 앞에서 4억달러 대북지원설의 진상 규명 못지 않게, 이 의혹을 제기한 세력과 그 의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번 의혹 사건의 배후에 부시 행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월간조선>과 한나라당이 '4억달러 대북지원설'의 근거 자료로 삼고 있는 것은 닉쉬가 작성한 '한미관계 보고서'이며, 이 보고서에서는 최초 정보원으로 주한미군 사령부와 CIA를 언급하고 있다.

주한미군 사령부와 CIA가 이러한 의혹을 자체적인 정보에 기초해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국내 정보기관에 침투해 입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를 흘려 이 문제로 한국에서의 정치 쟁점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위 여부를 떠나, '북한의 금강산 관광대금의 군사비 전용 의혹'과 '4억달러 비밀 대북지원설'은 '기밀'에 해당되는 사안들이다. 또한 이러한 의혹만으로도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치명상을 줄 수 있다. 공개 보고서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질 경우, 한국 정치에서 첨예한 정쟁이 일어나고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의 추진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미국의 정보기관이 왜 확인되지 않은 "의혹들(한미관계 보고서에서는 'suspicions'이라고 표현됨)"을 흘린 것일까?

공교롭게도 닉쉬는 보고서에서 "부시 행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다른 요소들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그 예로 금강산 관광사업을 들고 있다. 이는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금강산 관광사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북한이 관광대금을 군사적으로 쓰고 있고, 김대중 정부나 현대가 비밀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햇볕정책의 하이라이트로 찬양해왔다"는 닉쉬의 평가는 이러한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과적으로 의도성의 여부를 떠나, 부시 행정부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 동맹국이자 우방국인 한국 정부가 궁지에 몰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흘린 '북한의 금강산 관광대금의 군사비 전용 의혹'과 '4억달러 비밀 대북지원설'은, 한국의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을 통해 확대재생산되고 있고, 대선에서 최대 쟁점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익과 첨예하게 맞물려 있는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부시 행정부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떠밀리다시피 대북특사 파견을 준비하면서도, 강경 기조의 대북관이나 대북정책이 누그러지고 있다는 어떠한 조짐도 없는 상태이다.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내외의 한미관계 전문가들이 "부시 행정부는 한국의 대선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시 행정부로서는 대선 결과에 따라 한반도 정세를 반전시킬 '기회'를 맞을 수도 있다.

문제의 핵심은 부시 행정부가 '앉아서 한국의 대선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에 있다. 이번 4억달러 대북지원 의혹 사건은 이러한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정하고 깨끗한 대선을 치르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미국의 부당한 영향력'이 대선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교훈과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부시 행정부의 의도대로 한국의 대선 결과가 나온다면, 한반도 운명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한미관계 보고서' 전문은 평화네트워크 홈페이지(www.peacekorea.org) [평화자료실]의 [외부자료]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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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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