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차량과 인파가 홍수를 이루고 고층 빌딩이 즐비한 이 거리는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가고 없지만 그 날의 역사는 고스란히 간직한 채 어쩌면 오늘도 나 같은 무명 역사가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문에서)
김영삼 정부 시절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있던 조선총독부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일제 치하 반세기의 잔재가 사라진다며 쾌재를 부른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쾌재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통쾌하다는 느낌은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조선총독부가 쓰러지면서 일제의 잔재가 일거에 사라져버린 것일까?
현재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편집국장으로 있는 정운현 씨의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도서출판 한울)를 읽고 내리게 된 답은 분명 '아니올시다'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의 조선 지배 총본산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쓰러졌다고는 해도 경제적으로 조선을 수탈해 가는데 앞장선 조선은행 청사를 아직도 한국은행이 이용하고 있고, 당시 민족지도자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며 탄압을 일삼던 일제 법원 청사에는 바로 몇 해 전까지 대한민국 대법원이 입주해 있었다(현재 이 건물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뿐이라면 얼마나 다행일까. 불행하게도 일제의 유산은 계속된다. 민자 역사로 거듭나게 됐다고 자랑하는 서울역 역사 역시 일제가 지었던 건물을 정문 삼아 쓰고 있으며, 서울시청 역시 일제의 서울시청 격인 경성부청 청사를 규모만 늘린 채 그대로 이용중이다.
또한 대학로에 있는 문예진흥원 건물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본부 건물이며, 역시 대학로 근처에 있는 서울시장 관사는 일제 당시 서울시장 격인 서울부윤이 살던 관사였다. 게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거처하게 된 경무대는 과거 조선총독 관저이며, 이는 지금도 이어져 건물만 새로 지었을 뿐이지 같은 터에 청와대가 들어섰다.
물론 일제가 지은 건물을 그대로 이용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나 한국은행 건물만 해도 역사적 관점을 제외하고만 본다면 미적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건물임에는 틀림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 교육 측면에서도 이로운 점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 건물들에 대한 얼마만큼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가가 아닐까.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그저 '아, 우리 나라에도 저런 멋진 건물이 있었네' 정도의 감상만을 하게 된다면 이는 분명 문제일 것이다. 이는 흘러간 지 한 세기도 채 안된 역사의 망각이요,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지은이는 이 같은 망각의 경우가 극에 달한 한 예를 소개하고 있다.
국사 수업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서울 남산에 일제의 신사(神社) 중에서도 격이 높았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조선신궁이 어디 있었는지 물어보면 정확히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아무래도 그 수는 극히 미미하지 않을까 한다. 지은이 말마따나 이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신문이나 방송이라고 해서 유달리 관심을 보였던 것도 아니니 말이다.
조선신궁은 서울역 맞은편 힐튼호텔 근처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이곳에서부터 384개의 계단이 신궁 본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힐튼호텔에서 남산 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오르면 서울 과학교육관이 나오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일대를 포함해 남산 식물원 등이 있는 자리까지가 조선신궁의 영역에 속했다.
그런데 직접 답사해보면 알겠지만 여기에 조선신궁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으며, 이에 대한 안내문 하나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당시 조선인의 신사참배에 대한 역사는 그저 책과 사진 일부로만 남은 잊혀진 역사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백범 김구 동상에는 일본 만주군 장교였던 박정희 전대통령의 글이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상을 만든 이는 친일전력이 있는 조각가 김경승이다.
일제시대의 유산에 대해 다룬 책이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자칫 간과하기 쉬운 사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가 특히 아쉬워하는 것은 눈에 쉽게 띠는 건물이 아니라 현재 서울 각 동(洞)의 이름과 사람들의 이름이나 어휘 속에 남아 있는 소위 '소프트한' 잔재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시(市) 도시계획국 직원이던 고토 야스시(五島寧)가 92년 일본도시계획학회 논문집에 발표한 「경성(京城)의 행정구역명칭에 관한 평양(平壤), 타이베이(臺北)와의 비교연구」라는 논문을 인용하면서 서울에 아직도 일본식 지명이 많이 남아 있음을 질타하고 있다.
고토의 논문에 의하면 서울의 경우에는 일본식 지명이 아직도 93년 현재 31.1%에 이르며 특히 종로구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60.9%까지 올라간다. 또한 동(洞)을 나누는 경계도 일제 당시에 구획된 거의 그대로여서, 일본식 지명이 하나도 없는 평양이나 시 외곽 지역에만 일부 남아 있는 대만의 수도 대북과 상당히 비교가 되고 있다. 지은이는 바로 이 사실에 놀라고 있으며, 이 사실이 일본인에 의해 밝혀진 데 대해 더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의 감정이 격앙되는 부분이 가끔 눈에 띠긴 하지만, 조선총독부와 서울역, 서울시청, 서대문형무소, 경성제국대학, 한국은행, 대법원, 경복궁, 경운궁 등의 건축물들을 비롯해 용산이나, 남산, 북한산 등의 지역을 지은이가 직접 답사하고 느꼈을 분노와 안타까움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특히 직접 답사와 여러 자료를 섭렵함으로써 만들어진 만큼 현장감이 강한 이 책은, 글 사이사이 지은이가 그러한 유산들을 보고 느끼는 감상이라든지 지은이가 그 건축물들과 맺은 인연 등을 곁들이고 있어 읽는 데 지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도 언제 한번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점점 서늘해지는 가을날, 책 한 권 옆에 끼고 친구들이나 가족과 함께 교과서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현장 체험 학습을 떠난다면 이보다 값진 시간이 또 있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