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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네의 몸이 움찔 합니다. 봉순이는 포획된 지네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렇다고 봉순이가 지네의 고통을 즐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네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봉순이는 지네의 고통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종일 묶여서 무료했는데 장난칠 상대를 발견했고, 이제 그 상대가 장난을 받아줄 기력을 잃었느니 봉순이는 다시 심심해졌을 따름입니다. 죽어가는 지네 앞에서 봉순이는 졸린 눈을 감습니다.
개구리나 여치같은 곤충이었다면 나도 저 호피무늬 진돗개에게서 그들을 구출해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지네를 구해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몇 년을 부대끼며 살아왔지만 결코 지네와는 친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불 속을 파고들어 허벅지를 찌르고, 천장에서 내려와 귓볼을 물고 가던 지네. 그 싸한 지네 독보다도, 그 다족류의 수많은 발들이 내 살갗을 걸어갈 때의 감촉이란.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습니다.
이제 지네는 생을 포기한 것일까. 더 살아보려고 발버둥치지도 않습니다. 땅에 등을 대고 누운 지네. 봉순이의 눈을 속이려고 지네는 죽은 척 하는 것일테지요. 다른 관심사가 나타나 봉순이의 눈길을 끌어주기만 한다면 지네는 다시 기력을 회복해 달아날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봉순이네 식구들이 싸놓은 똥을 부삽에 쓸어 담습니다. 담장 아래 텃밭에 구덩이를 파고 똥덩어리들을 묻어줍니다. 호박 덩굴에는 잘 삭은 개똥을 먹고 자란 둥근 호박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습니다.
올해도 호박은 풍년입니다. 먹고 싸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고 봉순이와 길동이, 부용이와 꺽정이를 구박했던 것이 조금은 미안해집니다.
봉순이네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당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지네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딜 갔지. 저런, 지네의 몸뚱이 위에 개미떼가 새까맣게 몰려 있습니다. 지네는 여전히 꿈틀거리지만 이제 지네가 다시 살아나 사지를 빠져나가기는 정녕 어렵게 됐습니다. 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나 싶었더니 아귀같은 개미떼의 공격이라니. 지독히도 불행한 지네. 하지만 나는 지네의 불행이 가슴 아프지 않습니다.
무심하게도 나는 지네를 개미들의 손아귀에 맡기고 텃밭으로 갑니다. 여름의 막바지에 뿌린 얼갈이 배추가 제법 자랐습니다. 배추를 뜯어다 우물가에서 깨끗이 씻어 소금에 저려놓고 멸치젓을 다립니다.
밥도 갈고, 마른 고추도 물에 불려 갈고, 마늘도 다져 김치 담을 양념을 버무립니다. 그렇게 김치 담을 준비를 하다가 문득 지네의 운명이 궁금해집니다. 지네는 이미 개미들에게 끌려갔을까.
지네는 아직도 봉순이 앞에 누워 있습니다. 지네가 몸을 꿈틀합니다. 질긴 목숨이군. 개미들은 너무 큰 지네의 몸뚱이를 끌고 갈 방도가 없었던 것일까. 지네야, 부르며 몸을 구부리다 말고 나는 움찔합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라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지네의 그 많던 발들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개미들이 운반하기 쉬운 발들을 먼저 잘라 갔습니다. 서른두개의 발목이 모두 잘리고 몸통만 남은 지네. 지네가 몸통을 바르르 떱니다. 하지만 이토록 잔혹한 광경을 목격하고서도 나는 지네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다리 많은 족속에 대한 원한이 그리도 깊었던 것일까. 나는 절대 지네와 친해질 수 없습니다. 친해지길 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어째서 지네가 그토록 싫은가.
사납고 공격적인 지네의 그 끔찍한 독 때문인가. 나는 그 많은 숫자의 발 때문에 지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가. 실상 나는 다리 많은 족속보다는 입이 많은 족속을 싫어해야만 할 것을. 다족류의 독보다는 말 많은 족속의 독이 더욱 치명적인 것을.
이제 지네는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습니다. 지네는 아주 숨이 끊어졌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지네의 몸은 지금보다 더 가벼워질 것입니다. 다리를 잘라간 개미떼들이 본격적으로 지네 몸 속으로 파고들겠지요. 지네의 속은 텅 비고, 딱딱한 껍질만 남을 테지요. 지네의 사체 위로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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