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장편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사랑의 다양성에 대한 호소'이다. 사회가 정한 사랑의 제도와 가치에 대해서 불신하는 주인공 진희는 상처 받은 여자다. 그녀는 여러 명의 애인을 가지고 있다. 사회는 늘 외적인 요소로 한 개인을 평가한다. 사회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녀는 '이혼녀'이며 '문란한 여교수'일 뿐이다.
그녀가 폭력을 행사하던 전(前)남편으로부터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그녀가 '사랑'이라는 시한부 열정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방어할 수단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의 '사랑'이 도덕적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며, 사회의 가치와 상반된다는 것뿐이다. 사랑의 다양성보다 사회적ㆍ도덕적 가치가 우선하는 곳, 그게 바로 한국사회다.
상처 받은 영혼의 혼돈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문장은 시니컬하다. 소설 초반 진희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녀에게 사랑은 방부제의 효력이 다하면 상하는 식빵처럼 시한부일 뿐이다. 그래서 현석이 사랑을 고백할 때조차 그녀는 말한다. "정말 좋은 농담이야." 좋은 농담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녀는 두렵다. 다시 상처 받기가 겁난다. '차라리 사랑을 믿고 상처를 받을 바에야 사회가 정해놓은 가치의 반대편에 서겠다'는 다짐을 반복한다. 하지만 사회의 반대편에 서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녀의 내면은 혼란스러워지고 엉망이 된다. 그녀는 "일부일처제의 제도가 변하지 않는 한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이번에도 삶은 나를 앞질러 갔다. 아무리 용의주도한 척하고, 미리 잘못 될 경우를 예상함으로써 불행에 대비한다고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다. 정해진 일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기가 갈 길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삶이 내주는 예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행동은 인간이 하지만 삶은 운명이 결정한다."
"현석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길을 가던 아이 하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사람들은 땅에 엎드린 채 울고 있는 아이를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본다. 다친 데는 없니? 하면서 안아일으켜준다. 그런데 넘어지자마자 발딱 일어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어가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나, 참 쪼그만 게 독하네, 하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아무도 안아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어린애치고 너무나 일찍부터 타인이란 것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에 속마음과는 전혀 달리 남에게 안기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어가고 있는 그 아이의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자기는 이제야 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은희경은 한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감각적인 문장을 구사하되 가랑비처럼 천천히 스며든다. 그래서 시니컬한 진희의 음성엔 어떤 애조가 있다. 만약 소설 속에 나오는 진희보다 10년만 젊은 진희를 볼 수 있다면 분명 그녀는 사랑을 누구보다도 믿고 추구했을 여자였을 게 틀림없다. 진희의 목소리는 사춘기 시절의 사랑과 결혼을 전제로 하는 사랑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에게 진지한 고민을 제공할 것이다. 그 해답은 소설 속엔 없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은 작가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단서가 이 소설의 해답을 푸는 열쇠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귀찮은 분산을 해가면서까지 애인을 만드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삶의 치명적인 진실을 말해줄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익히 알고 있었던 말이라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실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고집이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도 그녀는 고민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사회 안에서 '사랑의 다양성'에 대한 호소는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