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음은 신장식 민주노동당 관악을지구당위원장(중앙선대위 기획위원장)이 지난 10월 6일 치러진 브라질 대통령선거 1차 투표 현장을 참관한 후 본지에 보내온 글입니다...<편집자 주>

▲ 브라질 노동자당 대통령 후보인 룰라가 연설하는 장면.
ⓒ 노동과 세계
룰라의 유세장은 열광 그 자체였다. 유세장을 꽉 메운 소년, 소녀, 노인, 노동자, 동성애자, 백인, 흑인, 혼혈 등 5만 여명의 청중이 내뿜는 열기, 그것은 브라질 최초의 좌파 대통령, 노동자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염원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 그리고 룰라의 연설 내내 뜨거운 눈물을 말없이 흘리던 쉰이 훌쩍 넘은 흑인 아저씨와 함께 필자의 가슴도 고동치고 있었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대선 선거운동을 참관하기 위해 꼬박 27시간을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참관단이 브라질 대통령 선거 1차 투표를 3주 남짓 남겨둔 9월 18일 저녁 사웅파울로 근교의 유세장을 찾아가 맛본 남미의 열정이었다.

선거가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룰라의 지지율이 상승, 1차 투표 50% 이상의 득표로 결선투표 없이 바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브라질 노동자당 22년의 역사가 브라질 최초의 좌파정권 탄생이라는 국가의 역사로 다시 태어나는 시점이 멀지 않았다는 감격을 그들은 감추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역사적 퇴조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지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당의 창당과정과 성장사를 살펴보면 원인의 일단을 만날 수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80년 창당되었다. 78년, 79년의 상파울로 ABC 지역 금속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에 따라 당시 금속노조 위원장이던 룰라를 비롯한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진보정당인 브라질 노동자당의 건설에 돌입한다.

물론 당시에도 반대가 있었다. 집권여당에 맞서기 위해 보수야당과 연합해야 한다는, 혹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얘기들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운동세력, 가톨릭 기초공동체운동(우리 나라에서 보자면 지역주민운동) 세력, 그리고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펼쳤던 재야 세력을 묶어 세우면서 당을 건설하였다.

처음 맞이한 1982년 선거에서 3% 정도의 득표로 쓰라린 패배를 맛본 뒤, 이들은 브라질 단일노총(CUT)을 건설해내는 동시에 대통령 직선제 투쟁을 펼치는 등 당을 꾸준히 성장시킨다. 이후 각종 선거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둔 노동자당은 2002년 드디어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다.

▲ 브라질 노동당 대통령 후보 룰라를 만나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이 고려인삼을 선물하는 장면.
ⓒ 민주노동당
노동자 대투쟁 이후의 과감한 진보정당 창당, 첫 선거의 패배에 좌절하지 않고 노동현장을 다시 조직한 끈기, 당내 민주주의의 철저한 실현을 통해 다양한 세력을 아우른 민주주의에 대한 원칙이 바로 노동자당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벌써 네 번째 대선에 도전하는 룰라가 특히 이번에 집권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브라질 대선은 물론이요, 브라질 사회의 핵심적인 대립지점은 금융투기자본에 대한 태도, 즉 신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 있다. 국영 석유회사와 5개 투자은행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기업이 사기업화 되고, 은행의 이자율은 대기업 20%, 중소기업 80% 신용카드 이용자에게는 최고 250%에 이르고 있다.

지난 10년간 실질임금은 감소하고 빈부격차는 늘어났으며 브라질 최대 도시라는 상파울로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룰라와 노동자당은 금융투기자본의 높은 이자율과 경제 약탈에 반발한 브라질의 산업자본가들을 우파로부터 분리시키면서 '反금융투기자본 연합전선'에 끌어들인다.

룰라의 부통령 후보인 호세 알렌카는 바로 브라질의 대표적인 섬유자본가 출신이다. 필자는 룰라를 지지하는 'CIVES'라는 고용자 단체를 방문하였는데, 이들은 신자유주의는 산업정책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소득의 공정한 분배가 사용자와 노동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금융투기자본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단결시키고 우파를 분열시킨 전술이 집권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지난 10여 년간 노동자당이 집권한 지방자치단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했다는 점이다. 노동자당의 참여예산제를 비롯한 투명하고 민주적인 시정운영,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노력과 성과는 세계적인 모범이 되고 있다.

현재 노동자당이 시정을 담당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수는 187개에 이르고 포괄하는 인구는 브라질 전체 인구의 1/3을 웃도는 5천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좌파는 국정 운영능력이 없다, 불안하다'는 인식을 노동자당은 성공적인 지방자치단체 운영으로 불식시킨 것이다. 브라질 국민들은 노동자당을 책임 있는 정당, 국정운영을 맡길 수 있는 정당으로 믿고 있었다.

87년 7, 8, 9월 투쟁을 돌이켜본다. 그 뜨거운 여름의 끝을 뒤로하고 민주노총과 함께 하는 민주노동당의 탄생을 맞이하기까지 우리는 십 수년을 기다려야 했다. 브라질 노동자들은 78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즉각 노동자당을 건설하였다.

당시 브라질 금속노조 위원장인 룰라는 대통령 당선을 코앞에 두고 있고, 단병호 위원장은 지금 감옥에 있다. 진보정당 후보인 권영길 후보가 자신은 진보가 아니라 중도 후보라고 밝힌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연합하라는, 즉 후보 출마를 포기하라는 사람들이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굳건한 노동자 중심성으로 산업자본가의 정당조차도 견인해 냈다. 무엇이 이렇게 다른 상황을 만들었는가? 필자의 결론은 간명하다. 브라질 노동자들이 우리보다 먼저 진보정당을, 집권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내기 위해, 새 세상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갖추기 위해 흔들림 없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6일 치러진 브라질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룰라는 46.44%의 지지로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룰라와 자웅을 겨룰 집권여당의 세하 후보가 1차 투표에서 23.20%의 지지율에 머문데다, 17.87%를 얻은 사회당의 가르티뇨 후보, 11.97%를 얻은 민중사회당의 시로 고메스 후보가 결선투표에서 룰라 지지를 선언한 만큼 룰라의 당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브라질 노동자당 창당 22년만의 성과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주간 <오마이뉴스> 제 24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이 기자의 최신기사11,000,000,000원짜리 태극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