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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8일 서울 명동유세에 나선 김민석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와 노무현 대통령 후보. 김민석 전 의원은 최근 정몽준 신당 '국민통합 21'에 합류했다.
지난 5월 28일 서울 명동유세에 나선 김민석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와 노무현 대통령 후보. 김민석 전 의원은 최근 정몽준 신당 '국민통합 21'에 합류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오늘의 한국정치에서 재야출신 정치인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일까.

세계화와 정보화를 말하는 21세기 시대에 아마도 '재야'의 이름을 먹고 사는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뀐 만큼, 이제 우리 정치는 재야 민주화세력의 가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을 잘 알아서인지, 이제는 재야출신 정치인들도 자신이 재야출신임을 굳이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바뀐다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재야 민주화운동이 가졌던 도덕적 신뢰다. 재야 민주화세력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역사에 던지는 희생과 헌신을 택했기 때문에, 국민들 앞에서 당당하고 신뢰받을 수 있는 세력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재야출신의 많은 정치인들이 그래도 '재야출신'이라는 후광을 업고 국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같은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 진출했던 재야 민주화세력은 이제 도덕적 공황 상태에 직면해 있다. 각자의 입지와 이해 차이에 따른 핵분열이 일어나고 있고, 기성 정치인들을 능가하는 줄서기와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민석 탈당의 충격파

얼마 전에 있었던 김민석 전 의원의 민주당 탈당과 정몽준 신당(국민통합 21)으로의 합류는 올해 대선정국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김 전 의원은 민주당 내에서 '이인제 대세론'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지난 봄, 이인제 의원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국민경선에서 노풍이 불고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자, 그는 노 후보의 손을 잡았다. "노무현-김민석과 함께 해야 미래로 갈 수 있다"는 말은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김민석 전 의원이 하고 다닌 말이었다.

그러나 불과 4개월후 노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정몽준 의원의 지지율이 급등하자, "정몽준 후보는 지역주의와 정쟁으로 얼룩져온 3김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는 데 적합한 조건과 신념을 갖추고 있다"며 말을 갈아탔다. 후보에 대한 평가와 소신은 각자의 자유이겠지만, 불과 반 년여 사이에 거듭된 이같은 말 바꾸기와 변신하는 모습은, 구정치인들을 능가한다는 탄식을 낳고 있다.

이같은 개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재야출신 정치세력의 구조적 분열은 이제 해결 불능의 상태로 치닫는 양상이다. 그 동안 재야출신 정치인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찢어져 있었다. 3김정치와 DJP연합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을 택했고, 정권교체를 우선하는 정치인들은 민주당을 택했다.

이들은 각자가 속한 정당 내부에서 그래도 개혁과 변화의 목소리를 내며 정당의 체질 개선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다른 독자적인 대안을 가질 수 없었던 이들은 결국 지역주의 정당구도 속에 함몰되며, 기존 정치구도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보다는 오히려 기존구도를 강화해주는 모습을 많이 보이기도 했다.

이들이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일까

한나라당의 경우 재야출신 인사들의 독자적인 발언권은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지난 6월의 후보경선을 전환점으로, 경선 승복의 논리 속에서 당내 개혁파들의 독자적인 목소리는 사라져버렸다.

지난 8월 2일 김대업 정치공작 진상조사단의 기자 브리핑 모습. 이재오 김문수 의원이 정형근 의원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지난 8월 2일 김대업 정치공작 진상조사단의 기자 브리핑 모습. 이재오 김문수 의원이 정형근 의원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 오마이뉴스 최경준
이회창 후보의 집권에 대한 기대가 당내에서 고조되면서, 이제 누구도 굳이 나서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얼마 전 한나라당이 '돈으로 산 6·15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논리를 폈을 때도, 자민련과의 연대론이 제기되었을 때도, 이들의 이의제기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지금 한나라당 재야출신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정서는 대안부재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 한나라당의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국민의 외면을 받은 채 콩가루 집안이 되어버린 민주당과 손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현실적으로 의미있는 정계개편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집권한 이후에 새로운 행보를 기약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재야출신 정치인들이 단지 소극적 체념에만 젖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에서는 재야출신의 이재오·김문수 의원이 가장 강력한 '투사'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이들은 지난번 병풍수사와 같이 첨예한 대치현안이 있을 때 주(主)공격수로 앞에 나서곤 한다. 과거 재야시절의 투쟁력을 십분과시하는 셈이다.

이들은 대북정책, 사회경제정책 등에 있어서 보수적인 정책기조를 갖고 있는 한나라당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안기부 출신 정형근 의원과 뛰어난 팀플레이를 구사하여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김문수 의원이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외쳤던 서노련의 김문수라고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6·15 남북정상회담을 돈을 주고 샀다며 통렬히 비난하던 이재오 의원이 지난 80년대 통일운동에 나섰던 이재오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민주당의 재야출신들 역시 오랫동안 동교동계의 눈치를 보며 때로는 줄서기를 하는 모습을 보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지난 16대 총선 당시 공천을 받기 위해 동교동계의 뒤를 따라다니다시피한 '386 정치인'들의 모습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많았다.

그래도 이들의 여건은 나은 편이었다. 전통적으로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을 표방해온 민주당의 정책 기조가 그래도 재야출신들의 정서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편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이후 이들은 당내 개혁적 의원들과 연대하는 쇄신연대를 결성, 당쇄신을 선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전성기도 잠시였을 뿐 국민경선 이후 노풍의 퇴조와 함께 민주당 재야출신들은 혼돈 속에서 분열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현재 민주당 내 재야출신들은 노무현 후보쪽과 후보단일화쪽으로 양분되어 있다. 일단 숫적으로는 노무현 후보의 선대위에 참여한 인사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은 대선의 승패 여부와 관계없이 개혁적 정체성을 지키는 길은 노무현 후보를 미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반면 탈당한 김민석 전 의원 이외에도 김근태·김영환 의원 등은 후보단일화 입장에 서 있다.

지난 10월 16일 김근태 후원회장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는 노무현 후보와 김근태 의원.
지난 10월 16일 김근태 후원회장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는 노무현 후보와 김근태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러한 상황에서 김근태 의원의 향후 행보 또한 관심사이다. 김 의원은 지난 70∼8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같은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이제 후보단일화의 가능성이 거의 희박한 상황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김 의원은 이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서는 궁극적으로 정몽준 신당쪽으로 향하게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최근 노무현 후보에 대해 김 의원이 보여주고 있는 냉담한 태도, 후보단일화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등을 보면, 중간 과정이 어떻게 되든, 선거일에는 그가 정몽준 의원의 손을 들어주는 곳에 서 있을지 모른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김근태 의원의 거취가 유동적이라 하더라도, 누가되든 민주당 재야출신 몇몇이 앞으로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 21에 추가 합류하게 된다면 이들은 그곳에서도 재야파의 둥우리를 틀게 될 것이다.

통합은 고사하고 핵분열로

이번 대선을 앞두고 개혁세력의 통합에 대한 기대가 한때 존재했다. 이번 대선에서 3김의 영향력이 급격히 퇴조하고 탈(脫)3김정치가 도래할 수 있는 환경을 맞고 있어, 그동안 3김 지역주의 정치 속에서 분열되어 있던 개혁세력이 이제는 통합을 시도할 수 있는 여건이 가능해졌다는 기대였다.

실제로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후보로 선출된 직후 '분열되어 있는 개혁세력의 통합'을 이루어내겠다고 말해 한때나마 이같은 기대를 높여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분열되었던 개혁세력의 통합은 고사하고 오히려 이제는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 21로까지 분열되는 3분 현상이 초래되고 있다.

세 곳으로 갈라선 이들이 펴고 있는 주장들을 듣노라면, '과거 이들이 어떻게 재야의 한솥밥을 먹으며 민주화운동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물론 다원화·복잡화되는 사회에서 과거처럼 어느 한 가치의 우월성을 강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상이 바뀐 것보다도 훨씬 많이, 재야출신 정치인들이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

철새 이야기는 이제 구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재야출신 정치인들 역시 대선을 맞아 그 철새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지않은가. 재벌후보의 품에 안겨 새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모습 앞에서 우리는 얼마만한 정치적, 아니 인간적 진실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설상가상이다. 노동전문 일간지인 <노동일보>는 지난 18일자 기사를 통해, 현정부에서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장관직을 지낸 한 재야출신 인사가 한나라당 입당을 타진중이라고 보도했다.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재야출신 정치인들의 도덕적 파산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구정치인들을 능가하는 줄서기와 변신이 난무하는 재야출신들의 정치 행태, 한때 이들에 의해 '청산'의 대상으로 지목받았던 구정치인들이 이제는 거꾸로 재야출신 정치인들의 약삭빠름을 조소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2002년 대선정국에서 일부 재야출신 정치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들에게 기대를 걸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참담한 비극으로 다가오고 있다. 2002년 대선은 이렇게 재야출신 정치세력의 공중분해를 낳고 마감될 것인가.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정몽준 의원에게 가버린 김민석 전 의원에게 보낸 민주당 우상호 위원장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져 있다.

"우리 386세대 정치인들이 누리는 명성이 수많은 동료들의 희생으로 가능했을진대, 그들과 공유했던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그들 또한 우리들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떨어졌고, 그런 사고를 벗어던지지 않는 한 현실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누군가 비판한다면 나는 입을 닫겠습니다."

그래도 이런 젊은 정치인들이 정치적 순결을 지키며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기에, 우리는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끈을 놓아버리고' 우리들을 떠나가버린 정치인들 대신, 이렇게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정치인들을 키우는 것.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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