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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원
우리 같은 선생들에게는 학기 초 첫 수업처럼 가슴이 설레는 때도 드물 겁니다. 새로 만나는 얼굴들, 그 신선한 공간이 바로 첫 수업이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삼월 첫 수업 시간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교실로 들어선 나는 먼저 출석부를 열고 아이들의 이름을 확인하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제 첫 수업은 언제나 제 이름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물론 그 이름 소개는 그냥 이름만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조 할아버지 때 압록강 가 삭주에서 강원도로 내려오게 된 우리 집안의 역사 이야기도 들려주고, 내가 태어난 마을 이야기도하며, 그래서 사람의 성(姓)은 곧 그 자신의 현재를 존재하게 한 과정을 담고 있고, 이름은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거는 소망을 담아내고 있다는 말을 들려줍니다.

가르치고 있는 과목이 한문인지라, 우리가 한문을 배우는 목적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이름 이야기를 끌어다대는 것입니다. 잘못 배워서 국한문을 혼용하자는 엉뚱한 생각을 가질까봐, 개인의 성에 담겨 있는 집안의 역사가 현재의 존재를 인식하는 뿌리가 되는 것처럼, 한문을 배우는 이유도 우리 민족의 뿌리와 의식을 찾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름 이야기를 첫 시간에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름 이야기를 하다가 출석부를 들춰 임의로 한 아이의 이름 뜻을 묻곤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은 제 이름의 뜻을 모릅니다. 제 이름의 뜻을 모르면 그 이름은 그냥 번호와 다를 바 없지요.

외국 사람의 이름에는 제 조상이 목수였다느니, 뭐였다느니 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알면서도, 제 이름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워, 이름을 묻고 한자 이름의 뜻을 풀이해주면 아이들도 좋아합니다.

가끔은 해외 소식에서 본 일본 사람 이야기를 꺼내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제 아들 이름을 악마로 지은 일본 사람이 있었답니다. 결국 그 이름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느냐고 묻자, 이름은 한번 듣고 기억하기 쉬운 것이 제일 좋다며, 악마는 기억하기 가장 좋은 이름이라고 설명했답니다.

이야기 끝에 저는, 그 일본 아버지는 기억하기 좋다는 것만 생각했지, 그 이름을 평생 듣고 살아야 할 자식 생각은 하지 않는 잘못에 빠졌다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름을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늘 악마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사람의 심성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름에는 나쁜 뜻이 없는 법입니다. 이름 값도 못한다는 말이 생긴 것도 그래서이겠지요.

그 해에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출석부을 열다가 특이한 이름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조꽃담. 한자 이름의 풀이를 해주면 때로 어떤 아이들이 한글 이름을 대며 제 이름에는 뜻이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한글 이름에도 당연히 뜻이 있기 마련이라 저는 이름의 뜻을 설명해주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한글 이름은 쉽게 그 뜻이 드러나는데, 꽃담이라는 이름은 정말 뜻을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꽃담이? 꽃무늬가 새겨진 담이라는 이야기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저는 그 아이에게 이름의 뜻을 물었습니다. 동그란 얼굴에 웃음기가 환한 꽃담이는 또박또박 제 이름의 뜻을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엄마하고 아빠하고 막 결혼했을 때 어느 집 문간방에 살았대요. 왜 주인집은 대문으로 출입하고, 문간방은 담 옆에 작은 문으로 드나드는 그런 집 말이에요. 그런데 그 집 담으로 봄이면 개나리 같은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났대요, 그곳에서 제가 태어났고요, 엄마 아빠는 신혼의 그 시절을 잊지 말자고 제 이름을 꽃담이라고 지었대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담이라는 뜻이지요."

저는 그 아이의 설명을 듣다가 제 마음에도 환하게 봄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꽃담이네 엄마 아빠는 부부 싸움을 하다가, '꽃담이 아빠' 혹은 '꽃담이 엄마'하고 부르면 신혼의 그 시절이 생각날 것이고, 그러면 갈등이 봄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꽃담이처럼 제 아이에게도, 이름은 아니지만 그런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집사람이 늦둥이 아이를 갖게 되자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의 이름 짓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큰 아이는 워낙 젊어서 낳아 이름에 별 관심이 없기도 했고, 또 장손이라 할아버지께서 낳기도 전에 이름을 미리 여러 개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제게 선택권이 없었지요.

그런데 둘째인 늦둥이는 제가 이름을 지어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며칠 동안 속이 좋지 않다던 아내가 병원에 다녀오더니 임신이라며 멋쩍어 할 때까지만 해도 아들인지 딸인지는 관심 밖이었는데, 몇 달이 지나자 아내가 제게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아무래도 딸 같아요. 의사선생님이 벌써 몇 번째나 정말로 큰 아이가 아들이냐고 묻는 걸 보니."

아마도 의사선생님은, 마흔이 코앞인 나이에 임신을 했으니, 아들을 낳기 위해 또 아이를 낳나보다 짐작하고 그렇게 물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심 딸을 원한 우리 부부는 무척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께도 그런 말씀을 드리고, 딸일 거라는 희망 섞인 기대를 털어놓았습니다. 한참 천식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께서는 힘든 몸을 이끌고 시장에 가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이불과 요를 사오시기도 했습니다.

"딸이라니 빨간 색으로 사왔다."
어머니도 늦둥이를 이미 딸로 단정하고 계셨나봅니다.
"어머, 이것 좀 봐. 딸인 녀석이 웬 발길질이 이렇게 심하담."
제가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온 어느 날 아내는 불쑥 솟은 배를 내밀었습니다. 뱃속의 녀석은 뭐가 신나는지 난리였습니다.

저는 아내의 솟은 배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봄아, 아빠다. 발길질 그만 하고 푹 쉬렴."
그러자 옆에 있던 초등학생인 큰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습니다.
"아빠, 얘 이름이 새봄이야?"
"그래, 새봄이라고 지었어. 새봄, 새로 맞은 봄. 엄마 아빠에게는 나이 들어 다시 봄을 느끼게 해 줄 아이니까 새봄이고, 또 태어나는 때가 봄이기도 하니 새봄이. 최새봄, 좋지 않니?"

제가 취한 말투로 그렇게 설명을 하자 큰 아이가 여전히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습니다.
"새봄이는 여자 애 이름 같은데요. 만약 아들이면 어떻게 해요?"
"아들이면? 그야 아들이면 만득이지 뭐. 늦을 만(晩), 얻을 득(得). 딸이면 새봄이, 아들이면 만득이."
제 말에 아내와 큰 아이는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달이 차 아이를 낳고 보니 아들이었습니다. 새봄이라는 이름은 무용지물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돌림자를 넣어 이름을 짓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가끔씩 늦둥이 아들녀석에게 '새봄아'하고 불러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제 마음 속에는 아내가 늦둥이를 가졌을 때의 순하고 고마운 감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듭니다.

"어, 만득이 많이 컸네."
주위 사람들이 우리 늦둥이를 보고 그렇게 부르면, 녀석은 볼멘 소리를 지릅니다.
"난 만득이가 아니라 진형이란 말이에요."

그러나 만득이든 새봄이든, 그 이름 속에는 늦둥이를 가졌을 때의 우리 부부의 기쁨과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역시 좋은 별명인 것 같습니다. 마치 꽃담이네 부모님이 자신들의 신혼 시절을 이름에 담아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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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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