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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한 영화는 이미 줄거리도 소상하게 알려져 있고, 그 영화에 대한 평도 어지간히 다 드러나 있어 스크린을 마주하고 앉으면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가 되기도 한다. 영화에 푹 빠져들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러나 역시 채플린이었다. 요즘 영화같지 않아 호흡이 다소 느리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영화 상영 두 시간 동안 나는 완전히 그 시절 '토매니아' 나라에 다녀온 것 같았다. 극장을 나와서도 독재자 채플린의 이상한 말투가 귀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것이 에스페란토어였다는 것을 집에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 토매니아의 전선.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엉뚱한 행동을 일삼는 이발사 출신의 유태인 병사 찰리는, 우연히 장교 슐츠의 목숨을 구하게 되지만 정작 자신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다.
찰리가 병원에 있는 사이에 독재자 힌클이 토매니아를 다스리게 되고, 그는 유태인들을 탄압한다. 병원을 나와 자신의 이발소로 돌아온 찰리는 세상이 바뀐 것도 모르고 특전대원들과 맞선다. 처형될 위기에 몰린 찰리를 이번에는 슐츠가 나타나 구해주고, 찰리는 찰리의 용감한 행동에 반한 한나와 사랑에 빠진다.
유태인 탄압 정책이 강화되면서 수용소에 갇힌 찰리. 결국 탈출에 성공하지만 장교의 제복을 훔쳐 입은 찰리를 모두 힌클로 오해한다. 오스텔리치를 침략한 군인들. 찰리는 힌클이 서야 할 독재자의 연단에 오르고, 그 자리에서 찰리의 명연설이 이어진다.
유태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인 게토는 늘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독재자 힌클의 유태인 탄압 정책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신세들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 정책이 잠깐 완화되기도 하지만 그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모두들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오스텔리치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불안한 게토에 마음 든든한 어른이 한 분 계시는데, 바로 찰리의 이발소가 세들어 있고, 한나가 얹혀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인 재클이다. 흰 머리에 주름진 얼굴이 온화하고 편안하다. 전쟁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집세마저 낼 능력이 없는 한나를 재클은 내치지 못한다.
찰리와 한나의 사랑을 제일 먼저 눈치 채고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재클이다. 지하실에 숨어든 슐츠를 감춰주고, 목숨 건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사람을 정하는 제비 뽑기 자리에서도 그는 정직하다. 그러나 한 편 그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한나의 지적에는 한 마디 덧붙임도 없이 수긍한다. 가장 어른의 위치에 있지만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마지막 위기에 몰린 유태인들은 결국 수레에 살림 살이를 모아 싣고 오스텔리치로 떠난다. 맨 앞에서 그 수레를 끄는 것도 바로 재클이다. 찰리가 수용소에서 고생하는 동안 유태인들은 오스텔리치에 자리를 잡고 나름대로 안온한 삶을 꾸려간다. 그러나 한나는 찰리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오스텔리치 전역에 생중계되는 힌클, 아니 찰리의 목소리. 마지막에 이르러 찰리는 한나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것을 듣는 한나. 그 옆에도 역시 재클이 있다.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약한 독재자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눈부시고, 거기에 채플린의 춤과 연기는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탄압받는 게토의 유태인 사이에 재클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얼마나 건조했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기둥이 되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재클이 있었기에 영화는 생활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우리에게 다가든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우리들 삶을 받쳐주는 노년의 모습으로 읽어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 감독 찰리 채플린 / 출연 찰리 채플린, 잭 오키, 폴레트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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