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자와 승자11시간만에 만남/ 김정훈 PD |
25일 오전 11시25분.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국회 본청 로비에 들어섰고, 약 10분 먼저 도착해 별실에 기다리고 있던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2층 귀빈식당 앞 계단 위까지 나갔다. 정 후보는 자신을 마중나온 노 후보를 바라보며 약 20m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축하합니다."
"내가 나가야 하는데 기자들이 못나가게 하네요."
두 사람은 악수와 포옹을 한 후 나란히 회동장소인 국회 귀빈식당에 입장했다. 앞에서 들어온 노 후보는 "오늘은 제가 자리를…"이라며 정 후보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숨막히는 승부가 끝나고 약 11시간만에 두 후보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승자와 패자의 11시간만의 만남…"자! 축하합니다"
둥그런 원탁 테이블. 노 후보와 정 대표가 나란히 앉았고 민주당 신계륜 후보비서실장, 이낙연 대변인과 국민통합21 민창기 홍보위원장, 김행 대변인이 나란히 배석했다.
정몽준 "어제 양복 색깔 좋으시던데요. 제가 기자회견을 봤어요."
노무현 "정말 어려운 결단 해주셨습니다."
정몽준 "앞으로도 잘 하셔야죠."
노무현 (기자들의 포옹 포즈 요청에) "포옹을 하면 내가 짧아가지고, 이렇게 좀 떨어져 있어야 좋을 것 같아요." (웃음)
정몽준 "오늘은 스케줄 안 바쁘세요?"
노무현 "이 일이 제일 중요하죠. 정 후보님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죠."
노무현 (국민통합21 민창기 홍보위원장, 김행 대변인을 보며) "정말 수고들 많았습니다. 이제 우리 정 후보 도와주시듯이 저도 열심히 도와주십쇼."
민창기 "예전에 신계륜 비서실장께 미리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분이 되시든 저희들도 똑같이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미리 약속을 했습니다."
노무현 "정 후보님의 이번 결단이 정말 역사적인 결단입니다. 아마 우리 국민들이 정치를 보면서 근래에 이 일만큼 기쁜 일이 없을 겁니다."
정몽준 "토요일날 KBS의 심야토론 보셨죠. 누가 나왔더라…. 김경재 의원, 김민석, 이재오 의원, 이렇게 나왔던데. 저도 그것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는데, 역시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것은 정권교체이고,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새로운 정치를 하라는 것이고. 물론 정권교체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있죠. 하지만 새로운 정치를 하라는 것이 더 큰 패러다임입니다. 새로운 정치라는 것은 정권교체를 포함한다고 보면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앞으로 노 후보님께서, 새로운 정치라는 것이 정권교체는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고, 뭐라고 할까 완전히 세상의 틀을 바꾸는 거죠."
노무현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해서 해달라는 것 아닙니까."
정몽준 "그렇죠."
노무현 "우리 정 후보님이 도와주시면 정치가 새로워질 겁니다."
신계륜 "새로운 정치의 첫 삽을 정말 멋지게 뜬 것 같습니다. 단일화라는 것을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고."
정몽준 "아직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으니까 저희들이 잘해야 할 것 같아요. (카메라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지자) 일생동안 찍을 사진 한번에 다 찍는 기분이야." (웃음)
노무현 "우리도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라서 실감이 잘 안났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이게 정말 되는 것인지. 우리가 새로운 실험을 하나씩 하나씩 성공시켜 온 겁니다. 우리 정 후보님이 어려울 때마다 결단을 잘해 주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도 잘 가도록 해야죠."
두 후보의 단독 회동은 약 40분간 비공개로 지속됐다. 이낙연, 김행 양당 대변인은 회동 직후 "양측은 정치개혁을 위한 정책조율과 선거공조를 위한 실무적 협의를 오늘 오후부터 시작한다"며 "정몽준 의원께서 노무현 후보 선대위원장을 맡으시는 문제는 법률적 검토를 거쳐 28일 다시 만나 협의한다"고 밝혔다.
민주-통합21 선거공조 본격 논의
두 후보의 만남을 기점으로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은 대선 공조를 위한 구체적인 실무 협상에 들어갔다. 양당의 공조는 크게 정책조율과 선거 공조 등 크게 두가지 차원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통합21은 이날 오전 늦게 열린 선대위 회의에서 민주당과의 공조 기구로 정책팀과 선거공조팀을 구성하고 각 팀별로 3∼4명을 임명했다. 정책팀장은 전성철 정책위 의장이, 선거공조팀장은 민창기 홍보위원장이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후보 회동 이후 정책조율과 선거공조 협의를 총괄 책임자로 김원기 고문을 임명했다. 이낙연 대변인은 "김 고문이 오늘(25일) 오후 5시에 통합21측과 만난 후 협의단을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두 당의 대선 공조는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정몽준, 2박3일 설악산 여행…노 후보, 선대위원장 맡나
양당의 정책조율과 선거공조 협의가 내용적인 결합 시도라면 정몽준 대표가 노 후보 선대위원장을 맡는 것은 대선 공조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지난 22일 진통 속에 나온 양당 후보단일화 추진단의 합의문에는 "후보를 맡지 않으신 분이 선대위원장을 맡는 등 공동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며, 단일후보의 대선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이낙연 민주당 대변인은 "정 의원께서 노무현 후보 선대위원장을 맡으시는 문제는 법률적 검토를 거쳐 28일 다시 만나 협의한다"고 밝혔다. '법률적 검토'란 당의 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이 다른 당의 선대위원장을 맡는 것이 법적으로 타당한가 여부라는 것이 양당의 설명이다.
이에 대해 선관위는 아직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선관위는 이에 대해 법률검토에 들어간 상태이며 늦어도 후보등록일인 27일까지는 유권해석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노 후보와의 회동 이후 당직자들과 오찬을 가진 정 후보는 가족들과 함께 2박3일간 설악산 여행을 떠났다. 설악산을 등정하며 누적된 피로를 씻고 향후 행보를 구상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측근들의 설명이다.
정 대표가 돌아올 예정일은 후보등록 시작일인 27일이다. 두 후보의 회동 예정일은 다음날인 28일. 정 후보가 노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을지 여부는 2박3일간의 '설악산 구상'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 | 정몽준 대표의 '아름다운 패배' | | | 불신의 한국 정치 '새바람' 일으킬지 주목 | | | |
| | | ▲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준 뒤 설악산으로 떠나는 정몽준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 | 불신과 오욕으로 점철된 한국정치권에도 깨끗한 승복의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까.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여론조사 승복이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정 대표의 이같은 '페어플레이' 정신은 이인제 의원의 경선 불복으로 국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와 혐오가 팽배해 왔던 한국의 정치문화에도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민창기 당 홍보위원장은 25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그동안 우리 국민들은 정치인이 무슨 말을 하면 다 의심을 했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그럴까 믿지를 않았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 대표의 깨끗한 승복은 정치를 몇십년은 앞당긴 것"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김행 대변인도 이날 국회에서 <오마이뉴스> 기자에게 "평소에도 정 대표가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면서 "정 대표는 기본적으로 페어플레이 정신이 투철한 스포츠맨"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지도부들도 정 대표의 결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노무현 후보는 "승복한다는 약속까지 해주신 정몽준 후보의 자세에 대해서 정말 거듭 감사드린다"고 말했고, 문석호 민주당 선대위 대변인은 "정치권에서도 페어플레이와 타협, 양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호평했다.
그렇다고 패배의 후유증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김행 대변인은 25일 내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으며 일부 자원봉사자들은 후보단일화 여론조사를 '대국민 기만극'이라고 규정, 불복을 선언하는 듯 혼란상을 보이고 있다.
김행 대변인은 25일 오후 기자실에서도 '국민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읽어내려가다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한 듯 또한번 눈물을 흘려,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국민통합21 와해설'을 진화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반면, 국민통합21 자원봉사위원회(이하 자봉위)는 이날 오전 '여론조사 불복' 방침을 천명하고 여론조사 재실시를 요구하고 나서 파장이 어디까지 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자봉위는 성명을 통해 후보단일화 여론조사를 '대국민 사기극'으로 규정한 뒤 여론조사의 무효와 재실시 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노무현 후보의 낙선운동과 정몽준 대표의 후보 등록 추진 등을 강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전날까지 '대통령 후보'였다가 하루만에 '대표'로 바뀐 정 대표는 심경 정리를 위해 이날 오후 가족들과 함께 설악산으로 떠났다.
김행 대변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정 대표는 설악산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라는 것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자유롭게 사는 것은 권력이나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를 통해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 이성규 기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