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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촛불시위
ⓒ 이주원
30일 오후. <금강경> 공부를 마치고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불교에서는 항상 분노를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그런 경계의 대상인 분노가 지금 국민들 가슴마다 맺혀있다. 광화문으로 나오면서 '왜, 국민들이 미국에 분노할까'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난 26일 MBC PD수첩에서 방영된 '그들만의 재판, 미군은 무죄인가'를 보면서 무척 분노했다. 특히 미군의 무죄판결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한 한국 경찰의 모습이 분노를 더 자극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더니. 저놈의 경찰들을 봐라. 뉘집 경찰이여. 한국경찰 맞냐?"

암투병중이라 절대 흥분하면 안 되는 어머니조차도 PD수첩을 보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운동권 아들을 둔 덕분에 아들에게 피해가 갈성싶어 우리사회가 금기시했던 그 어떤 표현도 '말'로 옮기지 않던 어머니였다.

6호선에 몸을 실은 승객들은 표정없이 앉아있었다. 간혹 들리는 말소리는 무시해도 될 만큼 조용했다. 그런 고요함의 정체를 기자는 알 수 있었다. 지하철에 몸을 실은 시민들의 분노였음을. 분노는 무표정함에 감춰져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오후 5시 50분. 광화문역에 도착했다. 교보문고 쪽으로는 전경이 쫙 깔렸거니 짐짓 생각하고 세종문화회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지상으로 나오는 계단에 발을 딛는 순간 흠칫 놀라 심장이 고동쳤다. 전경들이 출입구에 빽빽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기자는 섬찟했다. 경찰에 대한 두려운 기억 탓이었다. 애써 담담한 척 계단을 올라왔다. 계단에 올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교보문고 앞으로 갔다.

"조지 부시 사과하라!"
"살인 미군 처∼벌하라!"

대략 300∼400여명쯤 모였나. 상기된 얼굴들을 하고 미대사관 방향으로 구호를 외쳤다. 계획된 집회는 아니었다.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양심의 소리로 제안한 집회였기 때문에 큰 기대감도 없었다.

집회는 생각보다 너무 많이 달랐다. 나부끼는 깃발도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는 투쟁가도 없었다. 쇠파이프, 화염병도 없었다. 다만 촛불을 들고 있었을 뿐이다.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촛불.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길 염원하는 촛불이 교보문고 앞을 수놓고 있었다. 기대감이 없었던 만큼 감동이 컸던지라 기자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조지 부시는 사과하고 살인 미군을 처벌하라.
ⓒ 이주원
"어제 부시가 사과했다는 얘길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미국에 있는 부시에게 욕이라도 한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습니다. 이 개 야!"

수유리에 산다는 한 여학생이 대놓고 '부시'에게 욕을 해댔다. 준비된 연사가 아닌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석한 여고생이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는 건, 87년 6월항쟁 이후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동원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선이, 효순이 죽음이 서럽고 억울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재수생도 왔고 여중생들도 왔다. 50대 아저씨도 왔고 갓 걸음마를 뗀 아기도 왔다. 서럽고 억울해 참지 못해 나왔다고 했다.

12살짜리 딸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던 윤영희(38·주부)씨는 "딸아이가 '소파'가 뭐냐고 묻길래 설명해주는 중이었다"며 "부모 입장에서 예쁜 자식을 잃은 심정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서 이 자리에 왔다"고 했다.

▲ 시민 여러분! 버거킹에 들어가지 맙시다.
ⓒ 이주원
순간 촛불시위대에서 버거킹 체인점을 향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내려와!"
"나와라!"
"동 참 하 자∼"

공교롭게도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버거킹 체인점이 있었다. 촛불시위대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2∼3층 창가에 앉아 촛불바다를 내다봤던 버거킹 이용객들로 하여금 머쓱하게 했다. 촛불시위에 참석했던 한 시민은 "시민 여러분! 버거킹에 들어가지 맙시다. 양키놈들이 운영하는 버거킹을 이용하지 말자"며 버거킹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옷소매를 잡아채곤 했다.

오후 6시 40분경. 교보문고 앞 인도만 메웠던 촛불시위대의 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300∼400여명 정도에서 어느새 천명을 넘어 이천여명조차 훌쩍 넘겨버렸다. 광화문 교보문고 앞은 그야말로 촛불이 넘실대는 바다였다.

순간 교보문고 앞 도로를 가득 메운 촛불시위대 속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는 어느새 아리랑으로 이어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15년전 6월에도 시민들은 거리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거리에 모여 함께 불렀던 애국가는 4.13 호헌조치를 몰아내고 직선제를 쟁취하지 않았던가. 15년이 지난 2002년 겨울 시민들은 다시 거리에 모여 노래를 함께 불렀다.

▲ 촛불로 넘실대는 평화와 정의의 바다
ⓒ 이주원
아리랑을 따라 부르던 기자는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지 못했다.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이 서럽고 억울해서 울었고. 시민들이 함께 부른 '아리랑'과 '아침이슬'에 감동해서 울었다. 기자는 더 이상 취재할 수가 없었다. 광화문 촛불집회를 취재하려 했던 생각을 버리고 양초에 불을 밝혀 촛불바다로 걸어들어 갔다.

9시쯤 되었나.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음을 기약하며 하나 둘씩 거리의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졌다. 촛불바다에서 실컷 외친 덕분에 목소리를 잃어버린 기자는 간신히 성대 사이로 나오는 쇳가루 소리로 시위에 참가했던 정창수(34·회사원)씨에게 녹음기를 들이대고 물었다.

- 왜, 나오게 됐습니까?
"사람들이 미군들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분노와 슬픔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서로 나와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그냥 가슴에 묻어둘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어 나와 봤습니다."

- 우리 국민들이 분노하는 가장 근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제가 볼 때 아직 국민들의 생각은 미국 반대나 미군철수는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는 우리가 미군이랑 동등하게 취급받고 싶어하는 그런 욕구인 것 같아요. 죄를 지었으면 처벌받아야 하는데 무죄라고 판결 난 것이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낸 것 같습니다."

9시20분경. 촛불시위대는 해산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엔 촛불만 남아서 광화문을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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