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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 우리 집 아래채에는 디딜방아가 놓여 있었다. 요즘은 디딜방아를 민속촌에서나 구경할 법하지만 지난날에는 가정의 한 필수품으로 웬만큼 산다는 집은 다 갖추고 있었다. 몇 가마나 되는 곡식은 정미소로 보냈지만, 자잘한 일감은 죄다 이 방아로 해결했다.
제사 때마다 떡을 하기 위해 쌀가루를 빻는 일, 김치를 담그기 위해 고추나 마늘을 빻는 일, 삶은 메주콩 빻는 일 따위로 디딜방아가 쉬는 날이 없었다.
디딜방아를 빻을 때는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필요했다. 한 사람은 공이 곁에서 방아가 떨어질 때 튀어나오는 곡식을 쓸어 담고, 한두 사람은 디딜방아 발판을 온몸으로 눌러야 한다.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가 주로 공이 곁에서 일하시고 발판은 머슴이나 고모, 어머니가 맡았지만, 어른들이 없을 때는 나도 불려 가서 발판을 부지런히 밟았다.
제일 힘들 때는 인절미를 만들 때와 고추를 빻을 때다. 인절미를 만들 때는 쫀득쫀득한 끈기로 여간 힘들지 않았다. 때로는 덩이째로 딸려 올라와서 힘이 갑절은 더 들었다. 그러나 그 일이 끝나면 따끈하고 고소한 인절미가 입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고추는 조금만 지나면 매운 독기가 코를 톡톡 쏜다. 눈물 콧물을 질금거리며 디딜방아를 빻던 추억이 어제처럼 새롭다.
할머니는 디딜방아를 빻을 때마다 앞집에 살았던 김 목수 영감님을 들먹거렸다. 디딜방아 재목을 참나무로 예쁘게 깎아 만들어 수십 년 동안 아주 잘 쓴다고 귀에 못 박히도록 말씀했다. 김 목수 영감 댁과 우리 집은 앞뒷집으로 담 사이 한 우물을 두고 같이 쓰면서 살았다.
그야말로 ‘이웃사촌’으로 우물에만 가면 만났다. 해방 후 김 목수 영감 댁은 곧 아랫마을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이사를 간 후로도 지난날 이웃에 살았던 인정으로 내왕이 잦았고, 특히 그 댁 손자와 나는 초등학교 동급생이라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두 집안은 어른 아이 없이 아주 친한 사이로 서로간 쌀뒤주 형편까지 알며 지냈다.
김 목수 영감님은 아들 삼 형제를 둔 바, 맏아들이 수재로 일제 시대에 경북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분으로, 그 무렵 고향에서 드문 지성인이었다. 그분은 해방 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6.25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인민군이 후퇴할 무렵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어른들은 비밀스럽게 얘기했다.
그분은 예쁜 부인과 두 아들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났는데, 동네 사람들의 말로는 그때 워낙 미군들의 폭격이 심해서 북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는 얘기와 그렇지 않고 북으로 넘어가 살아 있을 거라는 양론이 분분했지만, 어쨌든 시신을 본 사람이 없는 이상 행방불명자로 오늘까지 남아 있다.
영감님의 맏며느리 -내 친구 김군 어머니- 는 참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 무렵 한촌이었던 내 고향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서울 말씨를 썼고, 구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남편 없이 살다보니 뜬소문도 많았다. 그 무렵에는 내 또래 친구 어머니 중에는 비슷한 처지도 더러 있었다. 그분들끼리 동병상련으로 서로 친하게 지내며 오가다 보니 남의 말 좋아하는 이들의 군입질감으로는 제격이었다.
그 뜬소문 탓이었는지 친구 어머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시집을 떠나 친정으로, 서울로 떠돌며 살았다.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것은 시동생이 교장선생을 찾아간 탓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시아버지인 김 영감님은 언제나 말이 없었다. 당신 며느님의 뜬소문에 쓰다 달다 단 한 마디도 없이 늘 가엾은 눈길로 며느리를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그 댁에 놀러가도 언제나 김 영감님은 “왔냐?” 단 한 마디뿐, 더 이상 말씀이 없이 오직 일만 했다. 당신 마나님은 이런저런 말씀과 함께 한숨도 많았지만, 당신은 도통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오죽이나 입이 무거웠으면 ‘황소’라는 별명까지 붙었을까.
당신 며느리는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한 많은 세월을 기다림에 지쳐 일찍 병을 얻어 먼저 이승을 하직했다. 곧 이어 당신의 마나님마저 세상을 떴다. 그러나 영감님은 당신의 별명 황소처럼 집을 굳게 지키면서 다른 아들의 아우성에도 끄덕치 않고 장손에게 집을 고스란히 물려줘서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몇 해 전, 고향 금오산에서 열린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모처럼 참석했다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영감님을 찾아뵈웠다. 그때 이미 춘추 아흔이 넘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흔 노인답지 않게 건강하시고 의복을 깨끔히 입고 계셨다. 첫 눈에 나를 알아보셨다. 나의 큰절에 답례는 옛날처럼 단 한 마디뿐이었다. “왔는가?”
친구의 얘기에 따르면, 그 즈음도 날씨가 좋은 날은 금오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캐다 드신다고 했다. 그 무엇이 영감님의 정신과 육신을 그토록 강하게 했을까?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만은 아들을 꼭 만나고 눈을 감겠다는 당신의 깊은 뜻이었으리라. 지난해 가을,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서울에서 있었다. 고향에서 올라온 김군에게 할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지난 봄에 돌아가셨네.”
“그래?! 기별하지 않고는?”
“자네는 먼 곳에 있고, 할아버님이 번거롭게 장사 치르지 말라고 그래서….”
“에잇, 친구야. 내 자네 조부 상만은 꼭 갈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김 영감님은 자나깨나 그리던 아들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실 때 눈이나 제대로 감았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말없이 일만 하던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분단 반세기만에 남북의 흩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는 이 즈음, 김 영감님이 이제까지 살았더라면 한 편의 감동 드라마를 펼쳤을지도.
"백수의 황소 영감, 마침내 행방불명의 아들을 품다"라는 머리기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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