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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이 연상된다. 6만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세종로가 다시 달아올랐다. 6월은 낮이었고, 12월은 밤이다. 그때가 승리의 기쁨으로 달아올랐다면, 이번에는 분노의 열기로 가득하다. 그때는 웃음이고 지금은 눈물이다. 어제의 축제에서 만난 이들이 노제로 다시 만났다. 외형이 다른 두 사건에서 함께 흐르는 에너지를 끌어내고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고가 필요한가.
"지난 10일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축구시합이 있던 날이죠. 저는 세종로를 온통 벌겋게 물들인 군중들을 보며 광기, 집단적 히스테리를 느꼈습니다" - 박노자, <오마이 뉴스> 인터뷰, 2002. 6.
박노자가 월드컵 열기에 딴지를 걸며 한 말이다. 박노자는 월드컵 열기 원인을 한국의 국가주의에서 찾았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란 근본적으로 기득권 우파에 의해 이식된 국가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박노자는 한국인들은 근본적으로 탈아입구하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그런 열등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집단성을 추구한다고 본다. 박노자에게 민족, 민족주의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런 인식에서라면 허상에 감동하고 들쥐처럼 군집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광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민족주의는 집단적 광기, 혹은 히스테리에 불과한가?
민족, 민족주의을 허상으로 생각하는 박노자
박노자는 임지현 등과 같이 민족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다. 그들은 민족주의란 지배자들에 의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국가체제가 형성되면서 지배자들에 의해 '민족국가(nation-state)'라는 언어가 만들어졌을 뿐 실제 민족, 민족주의의 실체는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념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노자에게 민족, 민족주의는 피지배자들에게 덧씌워진 허위의식이다. 그뿐만아니라 '폭력'과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허상이다. 박노자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권력'이 강화되었고 국가권력이 경직되면서 '개인의 인권'이 소외되었다고 본다. 그런 현상은 제국주의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박노자는 한국의 박정희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족의 국가화', '민족주의의 국가주의'경향을 지적한다.
"민족의식과 민족 주체성의 강조는 권위주의적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민족적 명분'을 조작, 강요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2001. 11.
박노자의 말대로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 과제, 민족의 근대화, 민족의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우리'라는 명분으로 '개인'을 유린했다. 해방이후 잔존 친일파와 결합한 국가주의 우파세력이 득세하면서 박노자가 말하는 '위로부터 강요된 민족주의'는 국가주의로 왜곡되었다. 국가가 곧 민족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민족과 국가의 결합, 민족과 권력이 결합되어 해방 투쟁의 원동력이 되었던 권력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실종시켰던 것이 사실이다.
민족주의에서 국가주의를 떼어내자
그러나 박노자, 독재자에 의해 '민족'이 독점되었다고 우리 역사에서 '민족'이 쓸모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현대사에서 '민족'이 왜곡되었다면 본래의 순의미를 회복해야하지 않겠는가. 한국인의 마음에 민족적 동질성에 대한 뿌리깊은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면 민족주의를 연대의 매개로 삼아 보편적 인간의 해방이념으로 견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민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억압의 문제, 특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패권이 한반도에서 자행하고 있는 권력범죄의 문제에 저항할 수 있는 대중적인 사회이념을 '민족'의 순기능에서 찾아낼 수는 없는가. 나아가 통일의 역사, 남북한 민중을 엮어줄 수 있는 평화적 연대의 고리를 맺기 위해 우리는 국가권력에 의해 억압되어왔던 '민족'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우리 역사에서 민족을 독점해왔던 국가주의를 떼어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 '민족정신'과 '국가의 위신'을 찾아내려는(사실 조작하려는) 조갑제의 무리 앞에 역사는 너무 무력하다...(중략)...어용 민족주의자의 무리는 우리와 그들의 싸움, 우리 국가와 민족의 성장이라는 일원적이고 단세포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민족의 역사'로 만드는 것이다." - 박노자, 위의 책
박노자가 지적했듯, 국가주의 우파는 민족주의를 왜곡해온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김정일 정권역시 민족주의를 전체주의 국가권력에 흡수해버린 집단이다. 문제는 그들에 의해 유린된 민족주의를 복원하고 우리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에너지로 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주의를 민족주의와 엄격하게 분할하고, 해방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저항적 민족주의, 열린 민족주의의 현대적 의미를 발견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광화문 촛불시위를 친북 세력의 준동으로 격하시키고 미국과의 협력과 북한에 대한 압박만이 진정한 '민족번영'을 위한 길이라고 조작하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국가주의 우파의 민족주의를 철저히 해체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는 보편적 인간해방을 위한 디딤돌
나는 자민족 우월주의나 민족 지상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열린 민족주의가 상정하는 최종적인 종착점은 민족이 아니라 인간이다. 박노자와는 달리 나는 민족과 국가가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정치적 실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정치적 폭력이 '실재하는 한' 그에 대항하는 사회적 연대를 결성하기 위해서는 안티테제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와 평등한 국가간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보편적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을 연대할 수 있는 이념적 장치로서 민족주의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열린 민족주의의 압력은 단순히 미국에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 정부 모두를 자극하는 것이다.
14일의 광화문 촛불 시위는 지난 6월 월드컵 응원의 대중적인 학습효과에 기인한 바 크다. 월드컵이라는 상업적 축제와 여중생 사망사건을 무조건 같은 맥락에 놓고 싶지는 않다. 월드컵 열기가 끓어오를 때 우리들은 여중생 사망 사건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한국의 4강진출에 더 열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박노자처럼 한국인들이 단순히 축구경기에 광분했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열등감의 발로라고 폄하한다면, 단지 국가주의의 일면이라고 분석한다면 그들의 집결을 가능하게 했던 에너지를 사장시킬 수 있다. 민족적 자존심으로 축구경기에 그처럼 열광할 수 있다면, 민족적 자존심은 불평등한 민족, 국제관계에 의한 개인의 인권 유린에 반대하는, 다시 말해 이번처럼 구체적인 인권문제로 견인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의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단순히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해방을 위한 열린 민족주의로의 견인의 대상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단호하고 예리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민족주의를 구체적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에너지로 삼자는 것이다.
민족적 자존심을 열린 민족주의로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 김구, <나의 소원>
민족적 자존심에서 효순이,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한다면 그것이 열린 민족주의로 연결되었을 때 다른 민족의 부당한 고통에 대해서도 따뜻한 관심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오직 효선이, 미선이가 한국인이라서 우리가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인간의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개하는 것이므로 우리도 세계 각국의 고통받는 소외된 민족들을 정의로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당장 우리나라에서 핍박을 받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단지 타국, 타민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보아야 하겠다.
이렇게 박노자가 지적한 우리의 어두운 민족주의, 그러니까 외국인 노동자의 고통, 재외동포에 대한 차별, 민족적 우월/열등감에서 비롯된 사도-마조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오직 민족주의 자체에 대한 경계와 비판으로 해결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민족주의에 반대하기 전에 국가권력에 의해 왜곡된 민족주의를 국가주의와 철저히 분리하고, 보편적 인권, 그리고 해방과 통합을 모색하는 열린 민족주의로의 견인을 위해 노력하자. 민족애는 오직 자기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니라 타민족에 대한 우애, 그리고 그 민족 구성원인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기억할 때 열린 민족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실험웹진 http://www.dalp.wo.to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에도 발송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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