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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 전, 민족문학작가회 광주·전남 지부로부터 김남주 시비 제막식에 초대받고 가는 길에 상무대 보병학교를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덧 30년 만에 그곳을 찾은 셈이니 상전벽해로 옛 모습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보병학교를 거친 사람이라면 너나없이 상무대 시절의 춥고 배고프고 힘들었던 아련한 추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1969년 2월 28일 밤, 용산 역에서 출발한 특별 수송 열차는 이튿날 새벽 송정리 역 플랫폼에 긴 경적을 울렸다. 각자 더블 백을 메고 객차에서 쏟아진 우리 초임 보병장교들은 역 광장으로 나가자마자 보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목표! 상무대, 뛰어 갓!"
육군 정복에 단화를 신었고 잠도 제대로 못 잔 끝이라 구보를 하자니 첫날부터 무척 힘들었다.

"3보 이상 구보"
"선착순 집합!"
"공격 앞으로!"
"원위치!"
참 징그럽게 들었던 말이다. 춥고 배고프고 졸리던 16주간 피교육자 생활이었다.

3월이지만 왜 그리 날씨가 추웠던지, 야외 교육만 나가면 눈이 펄펄 흩날리고 바람이 세차서 철모까지 날아갈 정도였다. 매일 세 끼 육군 정량을 꼬박 챙겨 먹었지만 늘 부족했다. 우리 학군단 출신 장교들은 '빵 소위'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피엑스나 이동 주보를 이용했다. 그때는 아무리 먹어도 고무줄 배였다.

입교 8주가 지나자 외출이 허용됐는데, 외출 시간 내내 먹고 목욕하고 또 먹어 목구멍까지 차 오르도록 먹고 귀대하지만, 그 날 밤 특성 훈련을 받고 나면 또 허기졌다.

일과표에는 밤 10시 취침, 이튿날 6시에 기상이지만 그것은 오직 일과표일 뿐, 자정이 넘도록 관물 정돈이니 병기 손질이니 잠을 재우지 않았다. 거기다 불침번을 서거나 내무반 한두 녀석의 말썽으로 단체 기합을 받고 나면 잠이 모자라서 늘 졸리는 생활이었다. 특히 2주간 계급장을 뗀 특공 훈련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스럽다.

5월 하순 무렵, 우리 중대는 '중대 공격과 방어'라는 교육을 받으러 보병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장성의 어느 멧부리 교장으로 갔다. 야외 교장에 막 도착하자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마땅히 피할 장소도 없었다. 우의를 입은 채 교장 잔디계단에 앉아 30여 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하늘은 구멍이 뚫린 듯 굵은 빗방울이 그치지 않았다.

교관은 내내 하늘을 쳐다보다가 악천후로 교육이 불가능해지자 오전 교육을 오후에 몰아서 하겠다면서 어디 가서 비를 피하고 12시 50분까지 교장으로 집합하라고 했다. 4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었다. 그때의 기쁨이란.

우리 내무반 10명은 교관 마음이 바뀌기 전에 후딱 산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에 이르자 하늘은 언제 비를 쏟았나 싶을 정도로 금세 쾌청했다. 우리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꿀맛 같은 자유시간을 누렸다.

어느 초가집에 들어가자 마침 아주머니가 혼자서 집안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처지를 말하고 밥값을 드릴 테니 점심밥을 좀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아주머니는 마땅한 찬이 없다면서 사양을 했다. 우리는 아무 찬이나 괜찮다고 했더니 그제야 집안으로 들게 했다.

우리는 대청과 안방 건넌방에서 젖은 옷을 말리면서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쉬었다. 그 틈에 편지를 쓰는 친구, 부족한 잠을 청하는 친구…. 아주머니는 남새밭에서 아욱을 뜯어다가 국을 끓이고 한편에서는 장작불을 지펴 무쇠밥솥에다가 밥을 지었다.

두 시간이 지나자 아주머니는 대청에다 큰상을 펴고 점심을 차렸다. 밥 주발에 고봉으로 담은 하얀 쌀밥이 입안에서 녹았고, 아욱국 맛이 기가 막혔다. 우리들은 혁대를 풀고 한솥밥을 다 먹었다. 밥상을 물린 후, 우리들은 밥값을 추렴해서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관두시오. 얼매나 집 밥이 그리웠으면 내 집을 찾아왔것소."
"아닙니다. 받으세요."
"아니라오. 참말이오. 내 집 놈도 군에 갔는데 어찌 군인한테 밥값을…."

아주머니는 한사코 밥값 받기를 사양했다. 우리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돈을 거뒀던 친구가 모은 돈을 쌀뒤주 안에다 넣었다. 그 새 젖은 옷도 대충 말라서 주섬주섬 입고 아주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교장으로 올랐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훈훈했던 전라도 장성 산골마을 인심과 시원했던 아욱국 맛이 내내 혀끝에 맴돌고 있다. 특히 아욱국은 장맛이 좋았던 탓인지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적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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