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령도 진부령도 죄 교통 통제라는 뉴스를 들으면서도 기어이 길을 나섰습니다.
소리없이 세상을 덮는 눈처럼, 나도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따스하게 내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 하나 품고 말입니다. 눈 내리는 풍경을 두고‘눈은 살아 있는 것처럼 세상에 닿아 잠깐! 잠깐! 하면서 사라집니다 / 녹은 눈 위에 눈이 오고 녹은 눈 위에 눈이 오고 / 그 위에도 눈이 오고 그 위에도 자꾸 눈이 옵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숨을 쉬는 것처럼’(김용택,‘겨울, 평화동 사거리’가운데)이라 읊은 시인도 있었지요.
12월의 강원도는 말 그대로, 하얀 눈의 나라였습니다.
백담사 입구에서 차를 내려 용대리 자연휴양림에 잡아 놓은 숙소에 먼저 들렀습니다. 백담사까지 다니던 버스는 눈 때문에 운행이 중단된 채였고, 8km가 넘는 눈길을 푹푹 빠지면서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용대리 자연휴양림은 미시령과 진부령이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나오는 곳입니다. 휴양림 입구에서 다시 2km쯤 산길을 더 올라가야 하는 터라, 걸어서는 도저히 가지 못하고 민박집 아저씨가 몰고 나온 차에 기꺼이 올라탔습니다.
작년 겨울에 비하면 형편이 낫다시며, 한 달 동안 꼼짝없이 눈에 갇혀 지냈던 지난 겨울 이야기를 한참이나 하시더군요. 친구들이 놀러왔다가 졸지에 갇혀서 차는 다 두고 몸만 겨우 빠져나갔다고요.
그도 그럴 것이 얼핏 봐도 50cm는 족히 되어 보일 만큼 눈이 쌓여 있었거든요. 올해는 산림청에서 포크레인을 가져다 길을 내 준 덕분에 차가 오갈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제가 묵은 집엔 겨울이라 손님도 거의 없고, 너른 산장에 달랑 방 하나만 예약이 되어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용대리 휴양림은 가만 들어앉아 있으면 세상사 온갖 근심 끊고 지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처럼, 깊고도 고요한 곳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화전민들 수백 명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하는데, 지금은 백담사 입구와 용대리 언저리로 다 이사 나가고 4집밖에 남아 있지 않다 했습니다.
겨울 나무들은 가지마다 양껏 눈을 올려놓고 힘에 겨워하고 있고, 계곡에도 물이 흘러가는 가느다란 한 줄기를 제외하고는 온통 눈에 덮여 있습니다. 처마마다 고드름은 제 키보다 길게 자라고 있었지요. 눈의 나라 강원도에 온 것이 실감나더군요.
짐을 풀고, 이 곳 산골짜기가 휴양림으로 지정되기 전부터 살았다는 형제들이 예쁘게 꾸민 찻집에 잠깐 들렀습니다.
“젊은 사람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는데…”하며 난로 위에서 끓고 있던 주전자에서 갓 따라 주신 것은 당귀차였습니다.
첫 맛은 조금 텁텁하고, 목으로 넘긴 뒤에는 달콤한 향이 오래도록 입안을 맴도는, 아주 기품 있는 차였지요. 이른 봄날, 당귀 햇닢을 따다 나물을 무쳐 먹으면 차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좋은 향이 입 속을 호강시켜 준다는 주인 아줌마의 설명도 맛깔스레 덧붙여졌습니다.
참으로 한가한 겨울 풍경이었습니다. 일부러 찾아온 손님이 따로 뭔가 주문을 하지 않아도 당귀차 몇 잔을 기꺼이 대접해 주려는 마음 씀씀이며, 무얼 먹느냐, 방이 춥지는 않느냐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까지 따뜻한 관심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없고 신문도 없고 사람조차 없는 골짜기에서 얼음 사이를 흘러가는 맑은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고 깊은 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곤 곧장 용대리 명물인 황태덕장으로 걸음을 옮겼지요. 지금이 바로 거진항에서 잡혀 온 명태들이 덕장 가득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기 시작할 때이기에 말입니다. 마침 눈소식도 있고 하니, 덕장에 내걸린 명태가 꽁꽁 얼어 긴 겨울을 보낼 채비를 마친 것을 보기엔 안성맞춤이었지요.
아직은 명태를 걸어 둔 곳보다는 비어 있는 덕장이 더 많습니다. 예년에 비해 명태잡이가 시원치 못하다고들 한답니다. 1월초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채워지기 시작하겠지만 명태가 때맞춰 많이 잡혀 주지 않아서 주민들 걱정을 끼치기 일쑤라는군요. 명태가 황태가 되기까지 사람 손길이 서른세 번 가야 하는데다, 명태가 꽁꽁 얼어붙는 영하의 날씨가 20일 이상 계속되어야 하고,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도록 바람도 알맞게 불어 주어야 한다니‘황태는 하늘에서 내린다’는 말이 과장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명태는 한 번에 20마리씩 엮어서 덕대에 걸어 말리는데, 내장을 다듬어 덕대에 걸어 말린 것을 계곡물에 사흘쯤 담궜다 다시 매어 단 것이라 합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어도 눈가루를 실은 바람이 불어와 찬 기운에 혼이 빠지는데 덕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빨갛게 튼 얼굴을 그대로 내어놓고 묵묵히 일을 하시네요.
황태 요리로는 용대 삼거리 용바우 식당이 유명하다지만, 그 맑고 고소하고 포슬포슬한 황태국을 맛도 못 보고 떠나야 했던 것은 큰 아쉬움입니다. 하지만 뭐, 살 날이 길 터인데 그 정도 아쉬움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지요? 눈(雪) 구경 실컷에 눈(眼)이 호강을 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