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표지
책표지 ⓒ 강
너그러움은 ‘함께 어울리는 것’을 도와주기 때문이죠. 다른 것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은 ‘환대’를 불러오고 발전을 가져옵니다. 물론 너그러움은 쉽게 품을 수 없고 품는다 하더라도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변화무쌍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너그러움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거겠죠.

우리는 많이 만나고 서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만나거나 얘기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남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지, 마음을 열고 남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 적은 거의 없습니다. 남이 자기 속으로 들어오려 하면 경계하고 밀어내려 하지요. 인터넷 게시판 문화는 그런 경계와 거부라는 골을 더 깊게 파는 것 같습니다. 살과 얼굴을 맞대지 않은, 누군지 접촉해보지도 않은 사람에게도 그런 골을 파는 거지요.

왜 사람들은 그런 골을 파서 만남을 피할까요? 그건 ‘공포’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감정인. 저 사람이나 이 세상이 나를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 않을까, 하는 바로 그 공포 말이죠. 역사는 자유를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조차 이 공포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여러 혁명을 생각해 보시죠). 공포는 자유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강압적으로 또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노예들은 끊임없이 대결합니다(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은둔해야지요). 그리고 이런 대결의 역사는 ‘침묵’을 낳았습니다. 말하지 못하게 입을 막는 거죠. 아니면 상대를 ‘저주’하게 만들지요. 침묵과 저주는 대화와 소통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각자 자신만의 성을 쌓고 그 속에 틀어박혀야 할까요? 중세의 자유도시처럼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속에서 ‘자기들만의 자유’를 누려야 옳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움베르트 에코(U. Eco)가 걱정했던 ‘새로운 중세’가 시작되겠죠. 젤딘은 '자두'의 노래처럼 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책은 이미 충분하다. 이제는 각자가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닦기 위해 역사의 자갈들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은 단순히 그가 속한 문명이나 국가 또는 가정을 예로 들어서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을 포기해야 한다”(74쪽).

젤딘은 좌절할만큼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는 이 다양한 사람과 개성 속에서 (공포와 같은) 어떤 공통적인 면을 찾으려 하고 그 초점을 사람들이 만나는 방식에 둡니다. 당연히 젤딘은 도서관에서 걸어나가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게 됩니다. 각 장의 시작은 젤딘이 직접 인터뷰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냥 무작정 이야기를 걸어 볼까요? 그래도 좋지만 젤딘은 ‘중재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수사, 논쟁, 횡설수설, 개인적인 언어, 또는 남들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거나 이해받지 못하는 데 대한 절망이 대화의 적이다. 대화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산파가 필요하다”(64쪽). 한 명의 중재자만 필요한 게 아니라 중재자 사이를 중재하는 중재자도 필요합니다. 젤딘은 중재자들에게 “대단한 인내와 무엇보다도 공포에 맞설 수 있는 능력”(209쪽)을 요구하지요.

중재는 다른 말로 ‘접붙이기’라고 표현됩니다. 에구, 너무 상스러운 표현이 아니냐구요? 글쎄요, 인간이나 동물, 식물이 뭐 그리 다르겠어요. 제가 보기엔 제일 정확하게 찔러주는 말 같아요. 싫으시면 중재라는 표현을 그냥 쓰세요.^^ “과거의 습관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 새로운 습관이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원예술의 접붙이기가 더 적절하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은 흔히 서로 마찰을 일으키게 되고 서로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접붙이기는 ‘공동의 상처 속에서 함께 치료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비이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사이의 화해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가장 좋은 토대는 언제나 공통의 괴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다”(432쪽).

그리고 사람은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요리’는 중요한 문화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먹거리이듯, 음식과 입맛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는 개방적인 삶으로 연결됩니다. 입맛을 부모나 사회적 기준에 맞춰왔던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맛을 보는 기술을 체계적으로 학습받기에 개방적인 태도가 생겨난다고 하는군요. 더구나 음식은 그 개방과 동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모든 요리법상의 진보는 외국 음식이나 외국 양념과의 동화에서 비롯되었고 요리법 또한 그 동화 과정 속에서 변모하게 된다”(130쪽). 요즘 유행하고 있는 퓨전 음식점이 정말 이런 개방성을 지향하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상업과 선전’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겠지요.

우리는 새로운 것이 찾아오면 과거의 것이 순순히 자연스레 자리를 내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망령’은 순순히 사라지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배회합니다. 자신들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그런 망령에 씌어있는 경우가 많죠. “위기에 처했을 때, 희망이 없어 보일 때,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을 때, 또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는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과거의 관념들이 책상 맨 아래 서랍에 꾸려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것들을 끄집어내어 다시 한번 시도해본다”(429~430). 미래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은 사실 과거죠. 아직도 친일파와 박정희의 망령이 사회를 활보하니 끔찍하기만 합니다. 단순히 사라지기를 기원하기만 해서는 안되겠죠. 뭔가 변화를 시도해야겠죠.

삶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젤딘은 생각하는 사고방식, 느끼고 기억하는 방식, 상상하는 방식을 ‘의식적으로’ 바꾸라고 얘기합니다. 현대사회처럼 정보가 흘러 넘치는 곳에서는 많은 양의 정보를 수용하는 것이 혼란을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 혼란을 막으려면 “적절한 크기의 지각을 선택하는”(553쪽)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으로 과거의 기억을 자극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암시를 이끌어 내거나 남들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통합시킴으로써 기억을 확장하는 방식”(554쪽)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상상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상상력이란 그것이 건설적일 때 즉 이미지들과 감각들을 생산적으로 결합시켜줄 때, 또한 당면한 장애물들을 제거해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도록 그 장애물들을 재결합시킬 때,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독특한 것과 보편적인 것 모두를 분별할 수 있을 때만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555쪽)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젤딘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영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복자 알렉산더처럼 힘으로 군림하는 영웅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격려하는 영웅. 단순히 듣고 격려하는 영웅이 아니라 ‘모범’이 되기를 거부하는 영웅이 필요하죠. “오늘날의 영웅은 남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이상적인 관계에서는 서로가 상대방으로 인해 더욱더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영웅들은 줄 줄도 알아야 하지만 받을 수도 있어야 한다.…영웅적인 관계는 용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누구나 속이지 않는 중재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는 것들을 자세하게 늘어놓는 데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586쪽).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주는 방법도 모르죠. 저 높은 연단 위에서 대중을 ‘선동’하고 ‘계몽’하는 영웅이 아니라 밑으로 내려와 손을 잡고 ‘함께 일할’ 영웅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젤딘은 세상을 비관하며 자살을 시도한 살인자와 냉혹한 세상에 무력함을 느끼던 수도사의 만남으로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당신은 죽기를 원하는데 무엇으로 그것을 막겠습니까? 그러나 죽기 전에 나를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당신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수도사의 이 한마디가 살인자의 인생을 바꿨다고 합니다. 살인자는 여전히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달았죠. 그리고 이 말은 수도사의 삶도 변화시켰습니다. “고통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 대신에 오히려 무엇인가를 해줄 것을 요구하게 된 것”(590쪽)이죠. 이것이 극빈자를 위한 에마우스(Emmaus) 운동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만남은 걱정과 근심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또한 희망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희망은 바로 인간다움의 원천”(591쪽)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참 많은 ‘논객’들을 만나게 됩니다. 논리적인 사고, 날카로운 분석력, 유려한 문장, 항상 많은 것을 배웁니다. 적어도 ‘論(논)’함에 있어서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정말 ‘客(객)’일까요? 항상 중심이 되고 선방을 뜨겠다고 자신만만한 사람들은 ‘客’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불만 지르고 다니는 여행자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뭔가를 접해 자극과 놀라움을 경험하려는 여행자가 아니라, 소설가 김영하의 표현을 빌면, “주변을 시끄럽게 하고 자신의 허무와 고독, 결단력을 강조하고 과장”하는 여행자인 거죠. 그래서 저는 ‘論客’보다 故김광석같은 ‘歌客(가객)’이 좋습니다.

덧붙이는 글 | 생각해볼 말말말

“모든 전류를 한 전구에 흐르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전구는 폭발한다. 에너지가 자신의 다양한 면으로 자유롭게 흘러 다니도록 놔두라. 정체성이 느슨할수록 더 열려 있을수록 한계가 없을수록 더 좋다. 자신의 감정을 산뜻하게 가꾸어야 하는 정원이라고 생각하라. 너그럽게 대하라. 그러면 내면의 새로운 재능들이 자극받고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된다. ‘자연의 법칙’을 따르라.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120쪽).

“요리란 당연히 감각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리는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흥미의 표현이다. 그리고 잠깐 동안이라도 넉넉한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음식은 가장 맛있는 법이다”(139~140쪽).

“新婦(신부)들은 가사 노동의 의무뿐만 아니라 남편을 ‘행복하고 유덕한’ 사람으로 변모시켜야 할 필요성과 같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미지의 벅찬 의무’ 때문에 겁에 질렸다. ‘그런 의무에 평생 속박된다면 진정 끔찍하다.’ ‘감사와 기쁨’이 ‘두려운 책임감’ 또는 서로 아끼는 마음이 금방 사라진다는 느낌과 혼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2세기 전에 이미 여성들은 남자들과의 관계를 수정하는 일에 착수했다. 한가지 방법은 여성들이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남자들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솔직함’이라는 방식이었다(153쪽).…남성은 이렇게 대답했다. ‘남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성공 여부에 평판이 좌우되기 때문에 남성들은 밖에서 자신의 평판을 신중하게 관리해야 했다. 친밀한 대화를 나누거나 ‘우리의 생각을 서로 교류하자’고 대담하게 말하는 것은 지나친 모험이었다. 한편 또 다른 남성은 ‘어떤 두 사람이 완전한 상대가 되어 신비적?절대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든가 특히 모든 면에서 서로 꼭 알맞도록 되어 있다는 말은 허구’라고 쓰고 있다”(154쪽).

“근본주의가 이슬람 세계와 서구 사이에 장막을 드리워 서로에게 호의를 베풀 모든 가능성을 막아버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여러 근본주의 운동의 격렬함과 폭력성은 실로 타협의 여지가 없는 대결 상태를 만들어놓았다. ‘근본주의’라는 단어는 1920년대 미국의 개신교 분파들 사이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고, 현재 미국인들의 4분의 1정도가 그러한 근본주의적인 견해를 공유하고 있다.…근본주의자들 가운데는 문맹자들과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극히 재능 있는 과학자나 학생들도 섞여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할 적절한 자리가 없고, 사실상 자랑할 만한 어떤 성공도 거둘 수 없다는 느낌을 공유한다.…중세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믿기는커녕 이들은 자신들이 현대의 위기에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고 있으며, 동료들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도덕을 창조함으로써 젊은이들이 빈곤에 대항해 승리하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확신한다.…근본주의는 극단주의로 간단히 처리해버릴 수 없다. 그것은 과거 공산주의만큼이나 강력한 세력이며 공산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부정과 좌절에 대응하고 이다. 억압받을수록 근본주의자들은 그만큼 더 자신들이 배척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이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폭력에 너그러워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10세기에 번영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슬람 사회가 외부인들에게 너그러움과 관용을 보이는 일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잊혀져서는 안된다(571~573쪽).


인간의 내밀한 역사

테오도르 젤딘 지음, 김태우 옮김, 강(200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