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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물지 않아 수확 못한 콩대를 만지는 박종운 시각 장애인
여물지 않아 수확 못한 콩대를 만지는 박종운 시각 장애인
시각장애인으로 국민기초생활 수급자인 박종운(48세)씨, "자신도 힘든 처지에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미담을 따라 허술한 집에 열려져 있는 나무대문을 두드렸다. 벌집처럼 다닥다닥한 부엌 딸린 단칸방은 세입자들의 고단한 일상과, 천장까지 차곡차곡 쌓인 연탄들은 가난했던 시절 70년대를 뒤돌아보게 한다.

문간방 미닫이문에 벽지가 너덜너덜 떨어져나가고 시멘트벽이 속살을 드러낸 3평 정도 공간이 박씨의 보금자리다. 박씨는 "조부 때부터 이 마을에 거주해왔다"며 "내가 살아온 얘기는 연속극으로 방영해도 일년 내는 못 끝날 걸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곁에 있던 시각장애인 장용문씨가 "박씨가 살아온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부분부분 이야기를 보충해준다.

집안의 몰락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종친인 밀양 박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박씨 집안은 대농이었던 부친이 40년 전, 탄광과 선박사업에 손을 댔다가 재산을 탕진하며 가세가 몰락했다. 날품팔이로 자녀들을 양육하며 생계를 꾸리던 모친마저 혹독한 고생 끝에 폐결핵으로 박씨가 17세 되던 해 사망했다.

시각장애를 비관, 자살을 시도하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가을걷이한 콩을 타작하려고 도리깨질을 하는데 갑자기 온 세상이 안개 속처럼 가물가물하더니 희미해졌다. 빈곤한 생활에 병원치료는 엄두도 못 낸 채 낙담하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연탄가게를 하던 형마저 망해서 도망가다시피 떠났다.

빈곤에 지친 동생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장애의 몸으로 혈혈단신 덩그란히 홀로 된 참담한 생활을 비관해 농약을 마셨다. 모진 목숨은 끊어지질 않고 온몸에 반점이 일어 숱한 고생만 해야 되었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며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말할 수조차 없다.

사랑병을 앓는 살아 있는 천사

박씨는 부모의 사랑은 고사하고 철저히 소외된 채 초등학교 문턱도 못 가고 빗물 새는 방에다 함지박 놓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근근히 살면서도 박씨의 가슴팍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돕지 못해 안달하는 묘한 사랑병이 생겼다. 그런 그를 주변 사람들은 '살아있는 천사'라고 말한다. 작은 집에서 좀 더 넓혀 지금의 이 집으로 이사와서 6년째 월세를 살고 있다.

사랑을 잉태하는 보금자리

박씨의 보금자리는 사랑을 잉태하는 공간이 되어 동네에서 버려지다시피 한 백일 된 갓난쟁이를 우유 먹여 기저귀 삶아 가며 길렀다. 우유가 떨어졌을 때 배고픈 아이가 보채고 울기 시작하면 업고 서성대며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이웃 사람들의 곤한 잠을 깨울까봐 앙상한 사나이 가슴팍의 빈 젖꼭지를 얼마나 물렸던가! 허기진 아이가 혼신을 다해 빨던 빈 젖꼭지에 난 상처는 아물 틈이 없었다. 그때 생긴 흔적이라며 가슴팍에 엄지 손톱 만한 흉터를 보인다.

버려진 아이와의 인연

이 아이가 박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비가 작은집 살림을 시작하자 어미마저 가출해 버려 조부모가 맡게 되었다. 조부모는 술만 마시면 갓난쟁이를 쓰레기더미에 버리겠다며 넋두리를 일삼았다.

보다 못한 박씨가 아비를 찾아주겠다며 간난쟁이를 업고 아비가 산다는 동네를 수소문해서 더듬적거렸지만 허사였다. 이 아이를 여섯살까지 길러 부모에게 인계하는 등 기른 아이 만도 다섯명이나 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수원 천안 등 각지에 흩어져 살지만 시집가서도 삼촌이라 부르며 가끔은 찾아온다.

사랑을 주지 더 못해 안달하는 후원자

10여년 전부터 박씨는 장애인 시설인 희망선교원에 매달 1만원씩 후원해오며, 비산동 평화보육원을 찾았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나오는 헌옷 가지들을 모아다주었고, 아이들 열댓 명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맘껏 뛰어놀게 했다.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하며 "공책이라도 사쓰라"며 고사리 손에 몇 푼 쥐어주며 격려도 했다.

상처만 주고 간 아이

기자와 밭으로 향하는 시각 장애인 박종운씨
기자와 밭으로 향하는 시각 장애인 박종운씨
제일 힘들고 생각할수록 마음 아픈 일은 힘겹게 양육해 온 여중학생이 집을 나간 일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산본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아이는 아비가 정신장애자였다. 상태가 심해지자 어미마저 가출했다. 이렇게 기른 아이가 사춘기가 되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이 아이의 바르지 못한 행동으로 박씨는 중학교에 불려가야 되었다.

아이가 서울의 보호소에서 나왔을 때 핸드폰을 사주며 마음을 잡도록 다독여보았지만 허사였다. 무절제한 핸드폰 사용으로 거액(145만원)의 요금을 갚느라 곤욕을 치러야 되었다. 이 아이는 주변에 살고 있지만, 이미 박씨의 손을 떠난 지 오래다. 박씨는 요즘에도 엄마가 야간업소에 일 나가면 홀로 방치되는 7세 아이를 돌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길어서 이어쓰기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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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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