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잊어버리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노무현 정권의 탄생과 함께 과거사를 매듭짓지 못하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중생 사망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촛불 시위와 소파(SOFA)개정운동도 사실은 잘못된 과거사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미 관계를 종속적 관계에서 동등한 상부상조의 관계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너무도 당연한 순리이다.
촛불 시위는 힘의 논리에 반대하는 것
촛불 시위는 미국 국민에 대한 반미 감정 표출이 아니라 힘의 논리로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패권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이다.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반미의 목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미국의 일방주의 또는 패권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인 것이다. 따라서 촛불 시위는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반미가 아니며 미국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이 항상 주장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근거하여 종속적인 관계를 좀더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로 발전시켜 달라는 것이 촛불 평화 시위의 목소리임을 노무현 당선자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 우리는 또 다른 과거사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 정부와 군 그리고 기업이 자행한 성 노예(소위 위안부) 제도와 강제징용 및 착취이다. 유태인에 대한 학살과 착취를 인정하고 사죄했으며 배상함으로서 과거사를 깨끗이 청산한 독일과는 달리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착취와 만행을 부정하거나 왜곡 또는 축소하면서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만행이 없었다는 역사 왜곡을 조직적, 체계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항의하고 수정을 촉구하는 시위를 전개했으며 지난 2002년 6월12일 '일본 교과서 바로잡기 국제캠페인'이 세계 71개국, 125개 도시에서 일제히 열리는 등 이른바 교과서 역사왜곡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되새겨 보면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이 과거 청산 문제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 왜곡이 이 순간에도 역사교과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등 한-일간의 진정한 우호관계를 방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21세기 한-일간의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파트너십’을 추구한다는 정치가들의 용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한-일 과거사의 올바른 청산 없이는 양국 관계에 발전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인식시켜주고 있다.
일제 만행 입증자료 미비로 역사 왜곡
성 노예 문제는 이미 언론을 통해 많이 보도되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에게 이제 새로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성 노예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과 직접 어린 처녀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던 한국인들에게 성 노예 문제는 일본이 자행한 만행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만행을 입증해 주는 객관적인 자료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교묘히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역사적 왜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 사회에서의 일본이 자행한 만행에 대한 인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한국인들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치의 만행이 잘 알려진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일본이 자행한 성 노예와 강제 징용 착취에 관한 국제 사회의 인식은 미약하다.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이러한 만행을 증명할 수 있는 사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UN 등의 국제기관에서조차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법안들이 제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서울대 여성연구소는 성 노예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고 일본의 만행을 입증하는 실증적 자료들을 많이 발굴하여 공개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서울대 연구팀은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한 미국 연방정부기록보존소에서 1945년 종전 직후 미군이 작성한 성 노예 신상카드를 발굴하는데 성공했다. 이 신상 카드에는 이름, 주소, 사진, 그리고 나이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어 앞으로 성 노예 연구에 기초자료로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
더욱이 연구팀은 젊은 한국여성들이 강압적 방법, 그리고 사기에 의해 끌려가 성노예가 됐다는 미군의 비밀 보고서를 발견하여 일본이 거짓말을 해 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결정적 단서를 찾는 성과도 올렸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사료가 없다면서 성 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봉사한 것이라는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미군 문서는 일본이 강압적인 수단으로 여성들을 동원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어 국제 사회에서의 일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성 노예 연구에 대한 학계의 관심도 고조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제 관련자료의 보고, 미 연방정부기록보존소
이러한 보도가 나가자 외교부 한 관계자가 모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1993년 일본의 관방성 장관이 성 노예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강압적인 방법으로 모집했다는 시인을 했었다는 '역사 교육'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개했다. 이번 자료는 실증적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관방성 장관의 발언이 사실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외교부 관계자는 왜 언론사에 전화를 해서 이러한 '역사교육'을 한 것인가. 그러나 그 당시 관방성 장관의 발언은 외교적 발언이었고 일본의 근본적인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자국민 보호가 우선되어야 할 외교부는 자국민 보호는커녕 일본 눈치보기에 급급하여 이러한 전화를 한 것이 아닌지 묻고 싶다.
미국 연방정부기록보존소에는 일본군과 관련된 상당 분량의 문서가 보관돼 있다. 그러나 미국 연방정부기록보존소에 어떤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일일이 모든 문서를 찾아 연구하는 수 작업밖에는 방법이 없다. 즉 이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과 같은 일로서 상당한 시간, 노력, 그리고 경비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은 물론 일본 법정 등에서 각종 과거사 관련 대일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위안부 소송과 징용 소송이 진행되고 있어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많은 소송이 제기됐으나 단 한 건도 승소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최근 일본기업이 대외 이미지 실추 등을 고려하여 이른바 '화해'라는 방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현재 미국에서 진행중인 소송을 비켜가기 위한 작전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에서 진행중인 성 노예 그리고 징용 소송은 집단 소송이라는 특징이 있다. 집단 소송에서 패소하면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는 물론 피해자 모두에게 배상을 해야하기 때문에 일본 정부와 기업은 처음에는 위안부와 징용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다가, 이제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한국정부와 한국인의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논리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2003년 1월 15일 캘리포니아주 항소법원이 강제징용 손해배상 특별법이 헌법에 위배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려 앞으로 진행될 징용 소송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미국서 진행중인 성 노예 및 징용 소송의 의미
일본 정부는 미국 국무부를 상대로 집요한 로비 활동을 전개하여 미국 국무부가 일본 편을 드는 의견서를 미국 법정에 제출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이러한 결정이 나온 것은 앞으로 미국에서의 징용 소송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 한국 정부는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성 노예 및 징용 소송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 정부는 오히려 귀찮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한국 정부는 단 한번도 한-일 기본조약에 대하여 분명하게 공식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다. 자칫하면 한국 정부가 간접적으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에서 진행중인 성노예 및 징용소송은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과거청산을 위한 실질적인 움직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국정부는 일제의 지배가 불법강점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그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명확하게 하는 방향으로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을 개정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과거 청산은 새로운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모든 외교적 그리고 국제적 노력을 해야한다. 성노예 및 징용소송에서의 승리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아직 끝나지 않은 마지막 전쟁을 마감한다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서울대 연구 프로젝트에 네티즌의 관심과 참여 그리고 동참이 필요하며 지원 또한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