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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왔다. 2년여전 가족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곳 런던으로 왔었다면, 이젠 가족을 뒤로 하고 홀로 런던 서북쪽의 벅햄스테드(Berkhamsted)라는 곳으로 떠나 왔다.
이유는 새로운 학교 때문이었다. 지난 1월부터 애쉬리지(Ashridge Business School)에서 또 다시 MBA과정을 이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매년 전세계에서 20여명 내외의 학생들만 선발하여 혹독한 과정을 이수시키는 곳으로 유명하다.
나는 학교 근처에 방을 구했다. 집 주인인 Karen과 Terry 부부는 이곳 벅햄스테드에서 태어나 만나 결혼해 아들 둘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영국인 부부이다. 나는 이들 집의 반지하층에 있는 방을 하나 구했다.
영국인들은 집치장엔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이들의 집은 조그맣지만 구석구석 앙증맞고 예쁜 소품들과 고전적인 장식물들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애완동물들을 좋아하는 여느 영국인들처럼 이 집에도 네 마리의 고양이와 한 마리의 강아지가 있다.
집을 나서면 타임머신을 탄 듯하다. 내가 어느 틈에 200여년 전의 유럽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워낙 옛 것을 소중히 여기는 영국인의 전통은 이곳 벅햄스테드에도 여실히 나타나 있다. 대부분의 거리와 건물은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불과 수십년 사이 현대적 양식의 건물이 빼꼼이 들어찬 서울과 비교할 때 이곳은 시대적으로 한 200여년 정도 후행하고 있는 듯하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끼긴 보도블럭을 밟고 골목을 돌아 하이스트릿(High Street)을 걸어가면 검게 그을린 고딕양식의 교회당을 접하게 된다. 안개라도 낀 날에는 흡사 무슨 마법의 성과 같은 비경을 연출한다.
우리 학교는 이 곳에서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다. 매일 아침 하이스트릿을 돌아 기차길 다리 밑을 건너 학교로 통하는 오솔길에 접어 들게 된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양 옆의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풀을 뜯고 있는 그들의 침묵에서 오히려 한없는 평화와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도저히 학교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오솔길을 달리다 보면 일주일에 한 두 번쯤 사슴들과 조우하게 된다. 사람들과 차를 피하지 않는 이곳 사슴들인지라 오솔길을 건널 때도 아주 천천히 건넌다. 열을 지어 길을 횡단하는 사슴 떼를 만나게 되면 무리가 다 건널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
곧 이어 길 양 옆으로 펼쳐져 있는 골프장을 만나게 되고 곧 Ashridge라 적혀 있는 정문을 지나 돌아서면 아름다운 중세의 카슬(Castle)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이 바로 우리학교의 본관 건물이다. 1280년경에 세워져 한 때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즐겨 찾았던 성 중의 하나이며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본관 건물에는 5만평 규모의 정원이 딸려 있다. 봄,여름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아름다운 색조와 향기를 내뿜고 있다. 이 가든은 유럽 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영국 정부는 1959년 이곳의 내부를 개조하고 몇 개의 부속 건물을 신축하여 Business School과 Ashridge Consulting을 설립하였다. 우리 학교에는 MBA과정을 위시하여 경영일반 석사과정 그리고 여러 기업체(BBC,BT, BP, Barclays, HSBC, Unilever, Tesco, HP,Merk)를 위한 Tailored Program등이 운용되고 있다.
본관 건물 뒤에는 수 백년 전 수도사들이 기거하며 평생을 기도로 정진하던 수도원이 이제는 도서관으로 개조되어 있다. 건물의 반은 온통 투명유리로 건축이 되어 현대와 중세와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발간되는 경영,경제관련 도서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다.
나는 이 학교에 발을 디딘 첫번째 한국인이다. 그 이유는 우리 학교가 워낙 소규모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워낙 미국식 경영대학원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달여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지금 나는 내 선택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물론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은 긴장과 고통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
44살의 유학생, 마흔 넘어 다시 시작한 영어가 그리 녹록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나는 '아는 만큼 세상을 크고 깊게 볼 수 있다'라는 신념에 산다. 그리고 훗날 새로이 배우는 이 지식, 즉 유럽식 경영방식이 우리나라의 기업경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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