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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동의 <시인은 숲을 지킨다> 는 평론집이다. 그리고, 동시에 평론집이 아니다. '시인이 하여야 할 일은 바로 숲을 지키는 것이다'라는 게리 스나이더의 말로 출발한 이 책은, 21세기 국내 문학의 최대 화두가 되고 있는 '생태문학'(혹은 녹색문학)을 언급한다.
책머리에 김욱동이 언급한 근대과학의 원론적 병폐는 이 책의 목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성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서양에서는 르네 데카르트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 그리고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이르러 최고점에 달하였다. 베이컨은 자유분방한 자연을 통제하여 인간에 복무하는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문을 해서라도 그 비밀을 알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자연을 고문을 하는데 쓰는 그 도구란 다름 아닌 이성과 합리주의였던 것이다. 사정은 동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16세기부터 주자학과 성리학이 널리 퍼지면서 합리주의는 융숭한 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인간을 가난과 무지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바로 그 이성이 마침내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하루에 130여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무려 2만5천여 종의 식물과 1천여종의 동물이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식물로만 좁혀 보면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27만여 종 가운데 12.5퍼센트가 멸종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멸종되는 동식물로부터 가장 큰 원인제공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서툰 의지를 가지고, 과학을 발전시킨 이래로, 생태계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생태계가 직면한 위협은 고스란히 인간들에게 닥칠 것이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이치다. 한줄만 당겨도 전체가 당겨지는 거미줄처럼 생태계 사슬에서 인간도 예외일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이 책은 '숲을 지키는 시인과 소설가, 수필가'들을 조망한다. 최승호의 시 '공장지대'를 시인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환경파괴를 통해 야기되는 치명성과 심각성에 초점을 맞춘다.
과학기술 중심주의, 곧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독선으로 빚어진 환경오염으로 인해, 각종 오염물질을 체내에 쌓아 놓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걸어 다니는 공장' 에 비유하는 건, 최승호의 시에 김욱동이 생태학적 상상력을 더한 결과의 은유다.
또한, 저자는 계속해서 고진하, 정현종, 오규원 등의 시를 통해서는 인간에 대한 독설이 아닌, 자연에 대한 애정을 발견해내고, 자연 안에서의 인간을 조망해내기도 한다. 저자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한 오규원의 동시 '길'은 이러한 생태시의 가치관을 잘 대변해준다.
하늘에는/새가/잘 다니는/길이 있고//그리고 하늘에는/큰 나무의 가지들이/잘 뻗는/길이 있다//들에는/풀이/잘 자라는/길이 있고//그 길을 따라가며/풀이 무성하고//풀 뒤로 숨어서/물이/가만가만 흐르는/길이 있다//물 속에는/고기가 잘 다니는/길이/따로 있고//고기가 다니는/길을 피해/물풀이/자라는/길이 있고//물풀 사이로는/물새가/새끼를 데리고/잘 다니는/좁은/길이 있고//...... <오규원 동시 '길'중에서>
저자는 나아가 소설과 수필에서도 계속해서 생태주의적 상상력에 기댄 녹색평론을 일갈한다. 김성동의 단편소설 '산난' 의 한 대목은 이 책이 조망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적절히 드러낸다.
"목어(木魚)도 십년을 때려야 제 소리가 나는 법, 일호차착(一毫差錯)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일렀거늘...하찮은 낫질에도 도(道)가 있다 안 하던고"
"그게 아니어요."
"아니면"
아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풀베기 안 하겠어요."
노승이 깊은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어늘, 일하지 않고 먹겠다 하느뇨?"
아이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손가락이 아파요. 풀들은…얼마나 아프겠어요?"
< 김성동 단편소설 '산난' 중에서 >
위의 대사는 동자승이 풀을 베다가 낫에 손가락이 베인 후, 노승과 나눈 대화다. 동자승이 풀을 베지 않겠다고 말하자 노승은 이를 꾸짖는다. 하지만, 동자승은 일을 하기 싫어서 풀을 베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낫에 베인 자신의 손가락이 이렇게 아픈데 하물며 허리가 잘리고 몸통이 잘리는 풀들은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각으로 더 이상 풀을 베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불가에서는 풀과 나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길가에 나뒹구는 지푸라기나 깨어진 기왓장에도 불성이 깃들여 있다고 믿는데, 동자승의 이 깨달음은 면벽참선하는 노승의 깨우침보다 한단계 위인 것이다.
저자가 조망하는 또 다른 문학, 수필에서 '녹색수필' 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저자가 관심을 갖는 '윤구병' 의 수필 '까막눈의 넋두리' 에선, 이런 글이 나온다.
"논과 밭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들이 모두 잡초는 아니라는 것도 여기 와서 깨우쳤다."
수필가 윤구병은 철학교수직을 때려치우고, 변산반도에서 농사를 짓는 괴짜(?)다. 그는 철학을 가르치는 일보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더 가까운 길'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농사꾼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윤구병의 '피사리'라는 수필엔 '잡초' 에 대한 그의 생각과 녹색문학, 즉 생태문학, 더 나아가 생태학과 환경, 그리고 자연속에서의 사람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문장을 볼 수 있다.
"40여년만에 농사일다운 농사일을 처음 해본 작년까지도 나에게 우리가 심지 않은 풀은 '잡초'에 지나지 않았고, 이 '잡초'는 원수의 사촌쯤으로 여겼습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잡초'를 알고 무자비하게 뽑아 내던져 버렸던 풀들이 약초와 나물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부터는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 생각하고 저절로 밭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들을 거두어 마흔가지 가까운 효소를 담으면서 '풀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쑥, 억새, 칡순, 조뱅이, 소루쟁이, 명아주, 엉겅퀴, 살갈퀴, 한삼 덩굴, 개모시풀, 달개비…, 하다못해 지난 해 너무 지긋지긋해서 체머리가 흔들리던 바랭이까지 단지와 항아리 속에서 지금 효소로, 술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윤구병 수필 '피사리' 중에서>
물론, 이 책에도 한계는 있다. 녹색비평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탐색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는 문학적인 성찰보다는 '생태학적 사고'로 추가 기울고, 녹색문학의 뿌리와 줄기에 대한 언급도 미미하다.
하지만, 시종일관 이 책은 그 동안 우리가 잊고 지내던 것들과 깨닫지 못한 것들, 그리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문제들을 꺼내고, 살피고, 반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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